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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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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서우 (77.♡.246.48)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72회   작성일Date 26-06-23 07:06

    본문

    책을 통해 위로를 받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나에게는 그 위로를 극대화하는 나만의 공식이 있다. 공식은 간단하다. 저자의 사주팔자가 나와 비슷하면 된다. 이 말을 들으면 몇몇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리를 슬쩍 피하기도 하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 나도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과거 최진석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였을까. 교수님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고집이 세지?"

    나는 매일 양치하고 나서 30초 동안 가글한다는 걸 시인하듯 담담하게 답했다.

    "네. 맞아요."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기저귀를 차던 시절부터 내 고집에 관한 일화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엄마에 따르면, 나는 입장이 매우 또렷한 아가였다. 엄마가 내 시야에서 단 1cm라도 사라지면 지구에 소행성이 돌진하는 것과 같은 울음을 터뜨렸고, 덕분에 엄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조차 나를 품에 안은 채로 해결하셔야 했다. 낯선 사람이 목격했다면 특수한 형태의 인질극으로 오해했겠지. 여기에 더해 아무리 엉덩이를 세게 때려도 달라이 라마가 부러워 할 정도의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다시 세상이 멸망한 듯 눈물을 터뜨렸다 다시 말해 자기만의 원칙이 또렷한 고집쟁이였던 것이다.

    교수님은 사주팔자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신 적이 있었는데, 나는 묘한 감정이 들어 질문을 던졌다.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시는 데, 사주 이야기를 하시네요?

    당시 교수님은 가볍게 웃으셨지만, 당시 위와 같은 말을 한 이유는 단순하다. 나에게 사주란 유럽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야바위꾼에 준하는 신뢰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호기심에 이끌려 내 사주를 보게 되었는데 소름 돋았다. 찜찜할 정도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내 사주는 표준시 기준으로 여덟 글자가 전부 양(陽)으로만 채워진 순양(純陽) 사주라고 한다. 음의 기운이라고는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양. 이 상태를 비유하면 벽을 뚫고 지나가는 코뿔소와 비슷하다고 하던데, 나는 이 비유가 아가 시절 때의 모습과 꽤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수님이 밥상머리에서 꿰뚫어본 내 아집도 이것이었겠지. 

    그런데 사주가 전달하는 내용은 단순 고집이 세다는 팩트 폭격이 자니지 않아 흥미로웠다.

    내 사주에서 나를 대표하는 일간은 임수(壬水), 일주는 임인(壬寅)이다. 임수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아니라 황하나 바다에 비유되는 물이다. 이 물의 핵심은 한 그릇에 얌전히 담겨 있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전혀 상관 없는 분야에 꽂혀 장바구니에 책을 넣고, 그 책을 알아보다 또 다른 책에 꽂혀 다시 장바구니에 집어넣는 고질적인 산만함이 곧 임수인 것이다. 참고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다른 곳에 또 다른 글을 쓰기 위해 탭을 3개 정도 열어두고 있다.

    임인(壬寅)에서 인(寅)은 호랑이다. 호랑이는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 이 기질은 이미 한참 전에 손을 놔야 할 것을 미련하게 붙들고 있는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사주에 따르면 임인일주가 진정으로 폭발하는 순간은 임의 깊이와 인의 추진력이 한 방향으로 완전히 정렬될 때라고 한다. 나는 살면서 딱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 시절 내가 하도 한 방향으로만 에너지를 모조리 쏟아부었는지, 부모님은 내 사춘기가 대체 언제 오는건지 걱정 아닌 걱정을 하셨다. 사실 나는 사춘기의 반항심 같은 것을 제대로 경험한 기억이 없다. 세상에 불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안의 모든 에너지가 이미 한 방향을 향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모님을 향한 반항에 쓸 연료가 남아있질 않았다. 

    여기서 산만한 임수 답게, 샛길로 가야겠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사춘기는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마땅한 배출구를 찾지 못한 상태라 생각한다. 청소년에게 공부 이외의 것들은 대부분 불순한 짓거리로 분류된다. 연애도 안되고, 게임도 안 되고, 춤이나 노래, 격투기도 안 된다. 책은 겨우 허락되지만,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이 시험과 무관하다면 시간 낭비 취급을 받는다. 에너지가 화산처럼 끓어 오르는데, 모든 벨브를 꽉꽉 잠가버리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팡 터져 버린다. 이건 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우는 건데, 이게 사춘기 시절에 피어나는 반항 에너지라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도 비슷한 논리를 제시했다. 시가 억눌린 감정을 안전하게 배출시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플라톤은 시인이 시민의 마음을 병들게 하므로 나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는 오늘날 폭력적인 게임이나 영화가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며 퇴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나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 편이다. 게임이든 영화든, 유머든 무엇이든. 자신의 에너지를 안전하게 터뜨릴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청소년들이 현실에서 불을 지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공격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야만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발달된 문명사회에서 이를 충족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마존 원주민처럼 눈에 보이는 동물들을 공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고안해왔다. 연극을 시작으로 콜로세움을 지어 검투사가 사자에게 먹히는 장면을 통하여 한 주의 스트레스를 정리했다. 억압으로 채워진 북한 사회는 생활총화를 운영한다.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를 향해 공개비판을 쏟아내는 구조다. 결국 방법에 있어서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청소년이나 성인이나 공격욕을 건강하게 배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만약 도덕이라는 잣대로 예술이나 문화 같은 배출구들을 막기 시작하면 결국 집단적 광기로 무장한 사이비 종교, 급진적인 정치 선동, 전체주의적인 민족주의, 묻지마 범죄 같은 것들이 그 출구가 되어 버린다. 이 지점에서 예술과 문화를 엄격하게 검열했던 사회가 대체로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다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사춘기는 그렇다. 억눌리면 반항, 출구가 있으면 추진력이 된다. 내 사춘기가 소란스럽지 않았던 이유도 에너지를 다른 곳에 맹렬히 소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사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내 책장에 꽂힌 인물들 중 마음에 드는 사람들의 생년월일을 뒤지기 시작했따. 그러니 임인일주가 두 명 정도 보였다. 일본 근대화의 설계자인 후쿠자와 유키치, 헤겔과 맞선 쇠렌 키르케고르이다. 인터넷을 조금 뒤져보니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방송인 정준하도 나왔다. 무한도전에서 정준하가 보여준 전설의 김치전 사건을 떠올리니, 당시에는 어이 없었찌만 지금은 납득이 됐다. 호랑이가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습성이 있으니까.

    그런데 사주팔자가 말하는 임의 깊이와 인의 추진력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때는 계기일식처럼 아주 드물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도 딱 한 번 경험한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거든. 그래서 책도 예전처럼 읽지 않는 중이다.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긴 시간 동안 지독한 루틴을 반복하는 이유도 이때문이 아닐까? 우주적 정렬이 알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 에너지가 일상 속에서 조금이나마 굴러갈 수 있도록 자기만의 구조를 만든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서전을 보면 별도의 루틴은 보이지 않지만, 검도와 방아찧기를 부지런히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이 두 사람은 임의 깊이와 인의 추진력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를 가만히 기다린 게 아니라, 무언가를 계속 두드렸다는 것이다.

    나는 사주가 나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타고난 기질과 내면의 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주변인에게 종종 말한다. 마음에 드는 저자를 찾고 싶다면, 본인과 같은 일주를 가진 저자의 책을 읽어보라고. 종교도 없는 내가 키르케고르에게서 묘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떤 이유는 단순하다. 그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독립적인 개인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같은 결로 만들어진 사람의 말에는 내 안의 무언가를 정확하게 찌르는 무언가가 있거든. 여기서 내가 주구장창 말했던 위로란, 내 안의 무언가가 무언가에 의해 정확하게 찔려 오래 맺혀 있던 응어리가 단숨에 풀어져 해소되는 감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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