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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와 베토벤 대전 공연 보고 옴~~~ㅋㅎㅎㅎㅎㅋㅋㅋㅎㅋ쿠쿠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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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전민정 (218.♡.110.70)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052회   작성일Date 23-08-30 11:08

    본문

    난 오후 7~8시에 자서 새벽에 일어나는 새벽형 인간이다. 그런데 노자와 베토벤 공연은 오후 7시 30분에 시작했다. 내가 따분한 클래식 음악을 졸지 않고 제대로 견딜 수 있을까.. 코를 골면서 졸면 어떡하나.. 등 다양한 걱정을 하며 갔다.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명확한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가 끝이다. 그렇다 보니 음악을 이루고 있는 각 음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각 음표가 품고 있는 진동수에 대해 해석할 능력도 없다. 난 음알못 그 자체다. 음악의 기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모르기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난 클래식이 아닌 BGM을 자주 듣는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BGM은 특정 장면과 함께 흘러나온다. 그래서 BMG은 듣자 마자 당시 내가 봤던 영화 속 그림이 머릿속에 바로 그려져 음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짤막하게 이루어진 <2WEI - Catapult>, <Hayashi Yuuki - Tears>, <Alan Silvestri - Main On End>, <Hayashi Yuuki - Justice-2> 같은 음악만 주로 듣는다.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 그래서 내가 소설을 못 읽는다.) 서사라는 큰 틀을 파악해 놓으면 쏟아지는 문자에 의식이 떠밀려 갈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은 명확한 언어를 바탕으로 사건의 연속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만 알면 이해하기가 쉽다. 만약 소설을 읽다가 현재 이야기 속 인물이 누구인지, 지금 마주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가물가물하다면 앞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으면 된다. 하지만 음악은 다르다. 음악은 나에게 명확한 언어가 아닌, 추상적인 음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래서 음악에서의 서사라는 큰 틀을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소설을 볼 때처럼 앞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음악은 명확한 언어를 바탕으로 전후 맥락에 맞춰 의미를 조립해 나가는 독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훨씬 수준이 높은 문화 콘텐츠다.
    나 같은 막귀는 음악의 선율이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게 어렵다. 그냥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맞다. 영화를 볼 때 흘러나오는 BGM은 이야기와 함께 어우러져 나오기 때문에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쉽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선율은 영화 BGM 보다 길고 이야기가 명확하게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아 이해하기가 어렵다. 처음 멜로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종착지로 향하는 궤적을 읽지 못하여 결국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혼란의 끝에는 졸음뿐이다. 굳이 BGM과 클래식 음악을 비교하자면 BGM은 한 페이지 분량의 짧은 서사라면, 클래식 음악은 여러 서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장편 소설에 가깝겠다.

    난 졸리고 음악에 대해 1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와 베토벤 공연을 졸지 않고 끝까지 다 봤다. 진짜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노자와 베토벤 공연은 난해안 음악의 연속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그 이유는 노자와 베토벤 공연 구성은 최진석 교수님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이는 마치 최진석 교수님의 말을 오충근 지휘자님께서 음악으로 번역한 것처럼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소설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단절된 단어의 총합으로 여기지 않는다. 모든 단어와 글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하나의 이야기 덩어리로 형성되어 있다. 이번 공연에서 접한 클래식 음악도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그런지 한 편의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최진석 교수님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나는 조용히 꿀잠 잤을지도 모른다.
    내가 음악에 대해 1도 모른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피아노를 잘 치는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취약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1도 부끄럽지 않다ㅋㅋㅋㅋ. 누군가는 음악을 가볍게 즐기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이번 노자와 베토벤 공연에서 이에 대해 정확하게 꼬집으셨다. 음악을 단순 즐기는 정도는 감각적으로만 즐기는 것에 불과하다. 감각적으로만 즐기는 것은 음악의 멜로디를 통하여 그 어떠한 사고도 하지 않은 채 음악만 듣는 것이다. 이는 마치 라디오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집안일을 한 사람에게 라디오에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왔냐고 물으면 어떠한 답변도 하지 못하듯이, 감각적으로만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선율, 멜로디가 있었는지 묻는다면 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시선은 강아지를 향해 있지만, 당시 강아지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을 때 답변하지 못한다면, 강아지를 보지 않은 것처럼.

    음악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여러 음표들이 사이좋게 어우러졌다고 하여, 책에 있는 하나의 문장처럼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료하다고 할 수 없다. 음악에 메시지가 있는 것은 분명 하지만, 메시지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음악은 하나의 명료한 문장이 아니라, 극도로 추상화되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하나의 시로 비교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최진석 교수님은 신의 언어를 음악,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시인이라 표현하셨다. 음알못인 내가 클래식 음악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던 이유다.
    같은 음악을 듣고 두려움, 긴장감, 100만 기마병이 진군하는 소리, 설렘에 요동치는 심장소리 등의 개념을 떠올리게 되었다면 그만큼 작품이 표현하는 바가 포괄적인 셈이다. 이와 비슷한 느낌의 시를 꼽자면 <악의 꽃>으로 유명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머리카락(La Chevelure)>를 꼽을 수 있겠다. 시의 제목은 머리카락(Chevelure)이지만 시를 보면, 머리카락을 머리카락이라 하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검은 바다, 어둠을 덮은 천막, 파도, 밧줄, 하늘 등으로 다양하게 바꿔서 표현한다. 더 나아가 파도를 마치 양털처럼 떠올리게 만드는 표현도 볼 수 있다. 훌륭한 음악과 시는 우리가 그동안 구분하기 위해 설정해 놓았던 명확한 개념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샤를 보들레르의 머리카락 덕분에 머리카락이란 단어로 밧줄과 바다, 하늘, 천막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훌륭한 클래식 음악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최진석 교수님께서 음악을 신의 언어, 시인을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비유한 이야기가 크게 와닿았던 이유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어냐 묻는다면, 역시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 님의 연주였다. 이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최진석 교수님은 '신의 경지(?)' (멍청이라 기억 안 남 ㅎㅎㅎㅎ;;;)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교수님이 무대에서 내려가신 뒤에 김다미 님의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교수님이 말씀하신 '신의 경지'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김다미 님은 악보를 보지 않고 홀로 눈을 감은 상태로 자유롭게 연주를 하셨다. 김다미 님의 바이올린 활은 올림픽 펜싱 선수들이 메달을 따기 위해 휘두르는 샤브레보다 더 날카롭게 움직이며 전하고자 하는 음을 단 한 번도 어긋 내지 않고 또렷하게 도려내셨다. 특히 김다미 님의 연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도미미 파시레 솔파파 도시라솔' 부분이었다. (* 막귀라 아닐 수도 있음.) 김다미 님은 연주에 완전히 몰입하셨는지 오른발로 바닥을 강하게 밟으며 리듬 타는 모습도 보여주셨다. 자칫 혼자 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케스트라와 오충근 지휘자님까지 이끌어나가는 듯한 모습으로 비쳐졌다. 이 모습은 교수님이 앞서 말씀하셨던 신의 경지에 가깝게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이분은 평소 대화하실 때에도 맥락을 놓치지 않으실 것 같고 말을 하실 때에는 박자감을 잃지 않으실 것 같다.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별처럼 살다 가라고 하셨다. 오케스트라 단원분들도 아름다운 별처럼 다가왔지만 가장 빛나는 별은 김다미 님이었다. 그리고 이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김다미 님의 존재는 마치 예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첫 부분에 나오는 솔로 플루트와 같은 존재였다. 만약 <목신의 오후 전주곡> 첫 부분에 플루트 솔로로 나오지 않고 다른 악기가 솔로로 나왔다면,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란 곡이 지금까지 기억되진 않았을 것이다. 별처럼 살다 가라는 최진석 교수님의 말을 곱십을 때마다 김다미 님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분들은 자리에 앉아 악보를 보며 차분히 연주하였지만 김다미 님은 이와 반대로 악보를 보지 않고 홀로 서서 자유롭게 연주하셨다. 머릿속에 있는 음색과 선율을 바이올린 현으로 완벽하게 짚어내는 듯한 모습은 조선시대의 명의 허준이 맥을 짚는 모습을 잠시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배우 성대모사를 잘한다고 하여 배우가 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악보를 제대로 읽고 연주할 수 있다고 하여 모두 별처럼 빛나는 음악가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분들도 별처럼 아름답게 빛났지만, 최진석 교수님의 말씀을 곱십을 때마다 김다미 님이 가장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음악이라고 하면 다소 지루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나는 정말 정말 재미있었다. <노자와 베토벤>에서 베토벤의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 오충근 지휘자님은 베토벤에 빙의한 것처럼 다가오면서 다양한 재미를 선사해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베토벤은 반골적인 성향이 짙다. 17~18세기의 음악은 딱딱한 형식이 주를 이뤘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다소 충동적인 무질서를 바탕으로 관례를 묵살하고 조롱하는 듯하다. 마치 폭풍과 같은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연상케 한다고 해야 할까?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오충근 지휘자님은 1부 때 입었던 검정 재킷을 벗어던지고 2부에는 폼이 넉넉한 한복과 같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자유롭게 지휘를 하셨기 때문이다. 정해진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앞서 '예가 드뷔시'라는 음악가를 예로 든 이유도 오충근 지휘자님의 이미지 영향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해 관심이 없는 내가 예가 드뷔시에 대해 아는 이유는 이 사람 또한 반골성향을 갖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화성학 이론을 완전히 무시한 상태로 음악을 쓴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음악을 연 사람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게 아닐까? 대전 공연장 리뷰 어쩌고 쓰면 뭐 준다고 했는데, 어디다 써야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여기다 써야겠다 ㅎ
    '신의 경지', '별처럼 빛나는 존재'를 직접 보고 듣고 싶으시다면, 9월 15일 노자와 베토벤 태백 공연에 가보시는 걸 꼭 추천한다. 노자와 베토벤은 다음에도 하겠지만 다음 공연에 김다미님이 계실 확률은 미미하니까!
    진짜 진짜 최고였다. 진짜 졸린 상태였서 눈도 머리도 아팠지만, 졸지 않고 끝까지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기억에 남는 교수님의 말은 있지만, 기억에 남는 멜로디나 선율은 없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음악은 듣지 못한 셈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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