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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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거꾸로 돌아감'을 염두하고있음은 그 반대인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염두해 두고 있음을 들어낸다.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것은 우선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실존하는 세계에서 부터 시작된다. 다시말해, 주체의 세계는 이해되어 있다. 이 이해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세계가 즉, 정상적 세계라는 관념이 나타난다. 정상적인 세계 속에서의 주체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들의 이해가 애초부터 작동되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는 한, 세계는 정상이다. 그러한 세계가 주체에게 보여주는 것은 철저한 안정과 평안함이다.주체들의 모임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정상적 세계를 지탱하는 지지대의 역할을 한다. 이것의 총체인 세계는 주체에게 스스로 존재함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계시된 세계를 통해 주체는 자신과 세계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정상으로 둔갑한 세계는 주체에게 한 없이 유혹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주체가 만약 세계에 대해서 어떤 완벽함을 본다면, 그것은 본능이 존재하는 자연세계의 법칙에 비견될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그 이질적 법칙 즉, 자연 그 자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서만큼은 통용되는 그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제대로된 세계'가 우선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디에서 무엇을 통해 '거꾸로 돌아가는 세계'가 나타나는 것인가?
제대로된 세계가 먼저 주체에게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 세계가 다른 식으로 계시되는 즉, 믿음을 반대하는 세계는 주체에게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
세계는 주체가 아니며 동일시의 작용이 이루어질 정도로 이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세계는 본능과 같은 것 이어야만 한다. 세계는 존재자의 조건이다. 세계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존재 '전체'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디까지나 존재'조건'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그것을 이해했을 때 주체가 등장한다. 주체는 존재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다. 세계는 조건일 뿐 결론도 아니고 완결도 아니며 목적조차 아니다. 우선 피투된 이후에 주체는 철저히 가능성으로써만 존재한다.
오직 조건만이 충족된 존재자에게 세계는 언제나 불완전성으로 들어난다. 결국, 세계는 주체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주체는 존재하는 한, 끝없는 불확실성에 머무른다.
정상적이지 않은 세계는 정상적인 세계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렇게 주체-세계라는 이자관계속에서도 불완전성이 들어나는데, 그 외에 다른 주체-세계 또는 인간이외의 존재자들-세계의 관계가 이 이자관계에 상호침투된다. 각각의 불안전성을 통해 또 다른 세계에 침투받고 침투한다.
끊임없는 차이화를 통해 정상적 세계에 틈을 만든다. 결국, 동어반복일 뿐이다. 세계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세계 속에서 세계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는 주체에게로 다시 돌아가야한다.
차라리세계가 거꾸로 돌아감은 현상을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정상적 세계에 근거해서 판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중적 세계 마치 모순 그 자체로 판단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마주한 주체는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의 '반응'은 단순히 신체적 반사라든지 뇌과학적 전기신호에 대한 기계적 반응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의 수동적 방식은 도저히 세계에 대해서 아니 대상에 대해 평가 조건이 아니다. 차라리 능동적 방식 즉, 주체가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방향 또 방향을 견지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힘'이다.
주체의 반응은 기존의 힘이 저항받는 순간 나타난다. 주체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저항받는 순간에 주체는 어떤 불안감에 마주한다. 불안감은 어떤 불확실성을 마주했다는 것이고 그의 세계의 균열지점이 다른 세계에 의해 침투당했는 것이다.
분명히 '평가'는 그 불안을 언어로 포획함으로써 파악가능하게 만들어 인식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부분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 일부분이 철저히 자기파괴에 쓰이느냐 아니면 자기보존의 힘으로 쓰이느냐는 각각의 주체에게 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 평가로 분석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 이것은 자기보존적 힘에 해당한다. 그것이 과다해 침투에 대한 방어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방어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다시말해, 어떠한 이질적인것이 내부로 침투해 오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만을 위해 주체는 그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일까?
여기서 하나의 적극성이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가히 현대적 책임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부여 받았다는 신화 속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하나의 세계를 판단한다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 사고다. 특히, 과거에는 그것에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예외적이며 그만한 자신감과 오만함 그리고 그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터전이 필요했음이 분명하다.
과거의 어리석음은 현대의 신화에 의해서 결정되고 철저히 그 믿음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현상들은 다시금 어리석음이 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과거에는 상상치 못했던 대적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 것일까? 또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나 있는 것일까?
그들의 이해가 애초부터 작동되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는 한, 세계는 정상이다. 그러한 세계가 주체에게 보여주는 것은 철저한 안정과 평안함이다.주체들의 모임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정상적 세계를 지탱하는 지지대의 역할을 한다. 이것의 총체인 세계는 주체에게 스스로 존재함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계시된 세계를 통해 주체는 자신과 세계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정상으로 둔갑한 세계는 주체에게 한 없이 유혹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주체가 만약 세계에 대해서 어떤 완벽함을 본다면, 그것은 본능이 존재하는 자연세계의 법칙에 비견될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주체는 그 이질적 법칙 즉, 자연 그 자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서만큼은 통용되는 그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제대로된 세계'가 우선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디에서 무엇을 통해 '거꾸로 돌아가는 세계'가 나타나는 것인가?
제대로된 세계가 먼저 주체에게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 세계가 다른 식으로 계시되는 즉, 믿음을 반대하는 세계는 주체에게 어떻게 등장하는 것일까?
세계는 주체가 아니며 동일시의 작용이 이루어질 정도로 이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세계는 본능과 같은 것 이어야만 한다. 세계는 존재자의 조건이다. 세계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존재 '전체'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디까지나 존재'조건'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그것을 이해했을 때 주체가 등장한다. 주체는 존재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다. 세계는 조건일 뿐 결론도 아니고 완결도 아니며 목적조차 아니다. 우선 피투된 이후에 주체는 철저히 가능성으로써만 존재한다.
오직 조건만이 충족된 존재자에게 세계는 언제나 불완전성으로 들어난다. 결국, 세계는 주체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주체는 존재하는 한, 끝없는 불확실성에 머무른다.
정상적이지 않은 세계는 정상적인 세계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렇게 주체-세계라는 이자관계속에서도 불완전성이 들어나는데, 그 외에 다른 주체-세계 또는 인간이외의 존재자들-세계의 관계가 이 이자관계에 상호침투된다. 각각의 불안전성을 통해 또 다른 세계에 침투받고 침투한다.
끊임없는 차이화를 통해 정상적 세계에 틈을 만든다. 결국, 동어반복일 뿐이다. 세계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세계 속에서 세계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는 주체에게로 다시 돌아가야한다.
차라리세계가 거꾸로 돌아감은 현상을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정상적 세계에 근거해서 판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중적 세계 마치 모순 그 자체로 판단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마주한 주체는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의 '반응'은 단순히 신체적 반사라든지 뇌과학적 전기신호에 대한 기계적 반응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의 수동적 방식은 도저히 세계에 대해서 아니 대상에 대해 평가 조건이 아니다. 차라리 능동적 방식 즉, 주체가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방향 또 방향을 견지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힘'이다.
주체의 반응은 기존의 힘이 저항받는 순간 나타난다. 주체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저항받는 순간에 주체는 어떤 불안감에 마주한다. 불안감은 어떤 불확실성을 마주했다는 것이고 그의 세계의 균열지점이 다른 세계에 의해 침투당했는 것이다.
분명히 '평가'는 그 불안을 언어로 포획함으로써 파악가능하게 만들어 인식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부분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 일부분이 철저히 자기파괴에 쓰이느냐 아니면 자기보존의 힘으로 쓰이느냐는 각각의 주체에게 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 평가로 분석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 이것은 자기보존적 힘에 해당한다. 그것이 과다해 침투에 대한 방어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방어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다시말해, 어떠한 이질적인것이 내부로 침투해 오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것만을 위해 주체는 그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일까?
여기서 하나의 적극성이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가히 현대적 책임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부여 받았다는 신화 속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하나의 세계를 판단한다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 사고다. 특히, 과거에는 그것에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예외적이며 그만한 자신감과 오만함 그리고 그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터전이 필요했음이 분명하다.
과거의 어리석음은 현대의 신화에 의해서 결정되고 철저히 그 믿음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현상들은 다시금 어리석음이 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과거에는 상상치 못했던 대적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 것일까? 또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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