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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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밭과 정원이라는 인간의 의식적 행위가 지성의 높낮이의 차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들은적 있다. 이것에 대해 자세히 논해보자.
밭과 정원은 둘 다 자연에 대한 인위적 조작이다.
이것은 자연의 도구화로써 전적으로 인간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 '위함'자체에도 등급이 있어보인다.
밭은 분명 인간의 생의 조건과 아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일정 면적의 땅에 의도적 조작을 가한다. 이 조작은 인간의 신체의 에너지로 변환을 목표로 한다. 그것을 위해 땅에서 성장할 수 있는 식물이 고려되는 동시에 신체의 에너지 변환 메커니즘에 순응할 수 있는 식물이 고려된다.
더불어 특정식물에 대하여 태양의 고도, 작물의 종류, 성장의 방법, 땅의 비옥도, 땅의 면적, 날씨 등의 생장조건들이 고려된다. 그리고 수주에서 수개월의 시간과 함께 식물에 대한 성장의 완료라는 명확한 목표를 끝으로 다시금 처음으로 회기된다. 아주 오래전 정착이라는 수많은 위협들을 일제히 소거할 수 있는 방식은 특정 지역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원에 대해 살펴보자면 땅을 밭으로 만드는 것에 비해 땅을 정원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의도가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밭은 절대적 필요에 따라서 계획되지만 정원은 그렇지 않음에도 계획된다. 비유하자면, 만들어진 이유는 명확하지 않음에도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것은 너무나도 많다. 이 세계에서 그렇지 않은 존재자가 있기나 할까? 어떤 존재자도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나 목적은 없다. 만약, 있다면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일 뿐이다. 그렇지만 정원은 독특하게도 인간이 만들었으면서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정원은 밭과 같이 명확한 이유가 들어나 있지 않다. 여러 자연물들의 배치와 조화는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이 작가를 이용하는 창조물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유용성에 측면에서 철저히 그것을 지니지 못하는 정원은 가치평가의 입장에서 예술과 같은 입지를 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현상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하나의 눈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비교는 무엇인가를 개념파악할 때 유용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 비교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개념파악 자체가 달라진다. 밭과 정원을 놓고 지성의 높낮이라함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염두해 두고 있는 듯하다. 그 두개의 구조의 우열을 나누거나 상호작용을 다루거나 각각의 기능을 설명해보는 것은 꽤 진지한 작업이 될 것 같지만, 이 틀은 하나의 상자 속에 담겨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즉,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 것이 집중 될 뿐 상자 밖에 있으며 상자라는 틀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은폐시킨다. 그것들을 통해 상자 안에서만 바라봐지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자폐적 이자관계만으로 파악된다. (첨언하자면, 이분법의 구조는 아주 오래된 사유의 습관이다. 존재는 비존재를 낳고 현상은 이데아를 낳았으며 차안은 피안을 낳고 감성은 지성을 낳고 긍정은 부정을 낳았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말해, 정원과 밭을 비교하는 건 문명이라는 틀을 강요한다. 틀 속에서의 밭과 정원은 하부와 상부를 연상시키면서 '우선' 문명적 시•공간을 앞세운다. 이 현상은 앞서서 분석한 시와 동일한 사태를 만든다. 그것은 검열을 통항 도덕•윤리의 자연화다. 한편, 밭과 정원의 비교는 하부와 상부 구조의 비교를 통한 문명 그 자체의 자체적 운동을 만들면서 문명의 자연화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밭과 정원은 자연에서 부터 끌어온 조작이다.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은 조작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자연이라는 집합이 문명을 부분집합으로 삼는다. 그러나 문명은 철저히 자연에 종속된다. 문명이라는 틀로 포섭되는 인간적 활동은 철저히 자연과 비교되어야만 사태를 더 높고 포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자연이라 불릴만한 것 들 중에 산이 있다. 산은 수많은 식물들이 높게 솟은 흙과 돌을 뒤덮은 형태다. 거리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도 있는데, 그 수많은 것들을 단 하나로 보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할 정도이며 수많은 자연물들을 보기위해서는 흙과 돌 위에 서야만 한다.
정원과 밭 위에서 바라본것처럼 그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떠한 유용성도 없는 것은 정원을 닯았고 흙에 집적 접촉되는 흙내음은 밭과 닮았다. 무작위로 심어져 있는 식물들과 햇빛마저 부서져 침투될 정도로 빽빽한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은 커다란 장막을 펼치고 있는 듯 하다. 이 것들을 흔들어대는 바람이 불어온다면 風磬풍경과 같이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바람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심지어나와 비슷한 높이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나보다 몇배는 큰 나무들이 흔들면서 서로 다른 율동을 자아내면서 다른 음율의 바람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식물들이 보금자리로 삼은 수많은 생명체들이 침묵으로 또는 재잘거림으로 일자화 시킬 수 없는 다수성을 만들어낸다. 이 것들을 모두 목격하고 들을 수 있는 그런 정신성이 있다면 이 엄청난 '생명의 약동'에 정신이 붕괴되고 말 것이다. 밭과 정원은 이 지점에서 나타난 것일지 모른다.이 품을 수 없는 혼돈에서부터 문명의 필요성이 나타난다. 아니, 불가피함이 맞다. 어느 순간 자연적인 것과 멀어짐을 가속화시켰거나 결정한 순간이 쏜살같이 찾아왔는지 모른다.
자연의 존재자에 대한 버거움, 그것과 동화 될 수 없고 같아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직감!
거의 무한한 존재자들이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그 압도적인 현상들! 식물의 쥬이상스에 대한 압도!
그 불가능성에서부터 밭이, 정원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다수성에서 부터 파악가능한 것을 떼어내서 그들 앞에 이식시킨다. 이 이식을 통해서 그들의 지성은 자신들의 불가능성을 위로하게 된다.
문명의 탄생이 단순히 인간의 생존을 공고히하기 위한 집단 행위였다면, 생존을 유지하는 선에서만 문명은 유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유지를 넘어선 진보라고 불리어지는 행위들은 생명유지와 자연상태의 종식이라는 설명방식으로는 불충분하다. 자연이 될 수 없는 인간의 운명 그 기이함을 직면하고 그것에 대한 일련의 과정이 작금의 문명이라 한다면, 차라리 이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
이러한 사유과정을 가지고 다시 밭과 정원에 집중해보자.
밭과 정원은 인간의 지성적 작용의 통제하에서 탄생한 산물이다. 이 통제 자체에서부터 자라나는 지성의 작용이 본능적 일체감과 충만함을 야기할 것이라는 기만과 오만이 숨어있다. 그러한 일체감은 지성과 이성의 작용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존재자체가 틈이 필요할 수 있을까? 틈이 아니라 곧바로 나타날 수 있는 것. 굳이 인간의 능력에서 찾자면 '직관'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밭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그런 일체감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정원은 위에 설명에 더욱 부합할 수 있을 정도로의 그런 유용성과 생명의 일체감과 떨어져 있다. 적어도 하나의 가설이지만, 정원을 만드는자는 자연을 그리워하는 예민한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밭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지성의 기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설계와 계확하에서 작용하는 감성들이 자연존재자들을 선별하고 구분하며 배치한다. 그들의 자연의 모방은 공백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들이 자연이되지 못하고 틈을 가지고 있는 불안감과 공허함이 정원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태자체에 대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검열과 이분법적 구조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제는 다시 돌아와 가벼운 사유를 행한 주체 그 자체에 대해서
자세히 논해보아야 할 것이다.
밭과 정원은 둘 다 자연에 대한 인위적 조작이다.
이것은 자연의 도구화로써 전적으로 인간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 '위함'자체에도 등급이 있어보인다.
밭은 분명 인간의 생의 조건과 아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일정 면적의 땅에 의도적 조작을 가한다. 이 조작은 인간의 신체의 에너지로 변환을 목표로 한다. 그것을 위해 땅에서 성장할 수 있는 식물이 고려되는 동시에 신체의 에너지 변환 메커니즘에 순응할 수 있는 식물이 고려된다.
더불어 특정식물에 대하여 태양의 고도, 작물의 종류, 성장의 방법, 땅의 비옥도, 땅의 면적, 날씨 등의 생장조건들이 고려된다. 그리고 수주에서 수개월의 시간과 함께 식물에 대한 성장의 완료라는 명확한 목표를 끝으로 다시금 처음으로 회기된다. 아주 오래전 정착이라는 수많은 위협들을 일제히 소거할 수 있는 방식은 특정 지역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원에 대해 살펴보자면 땅을 밭으로 만드는 것에 비해 땅을 정원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의도가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밭은 절대적 필요에 따라서 계획되지만 정원은 그렇지 않음에도 계획된다. 비유하자면, 만들어진 이유는 명확하지 않음에도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것은 너무나도 많다. 이 세계에서 그렇지 않은 존재자가 있기나 할까? 어떤 존재자도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나 목적은 없다. 만약, 있다면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일 뿐이다. 그렇지만 정원은 독특하게도 인간이 만들었으면서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정원은 밭과 같이 명확한 이유가 들어나 있지 않다. 여러 자연물들의 배치와 조화는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이 작가를 이용하는 창조물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유용성에 측면에서 철저히 그것을 지니지 못하는 정원은 가치평가의 입장에서 예술과 같은 입지를 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현상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하나의 눈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비교는 무엇인가를 개념파악할 때 유용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 비교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개념파악 자체가 달라진다. 밭과 정원을 놓고 지성의 높낮이라함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염두해 두고 있는 듯하다. 그 두개의 구조의 우열을 나누거나 상호작용을 다루거나 각각의 기능을 설명해보는 것은 꽤 진지한 작업이 될 것 같지만, 이 틀은 하나의 상자 속에 담겨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즉,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 것이 집중 될 뿐 상자 밖에 있으며 상자라는 틀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은폐시킨다. 그것들을 통해 상자 안에서만 바라봐지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자폐적 이자관계만으로 파악된다. (첨언하자면, 이분법의 구조는 아주 오래된 사유의 습관이다. 존재는 비존재를 낳고 현상은 이데아를 낳았으며 차안은 피안을 낳고 감성은 지성을 낳고 긍정은 부정을 낳았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다시말해, 정원과 밭을 비교하는 건 문명이라는 틀을 강요한다. 틀 속에서의 밭과 정원은 하부와 상부를 연상시키면서 '우선' 문명적 시•공간을 앞세운다. 이 현상은 앞서서 분석한 시와 동일한 사태를 만든다. 그것은 검열을 통항 도덕•윤리의 자연화다. 한편, 밭과 정원의 비교는 하부와 상부 구조의 비교를 통한 문명 그 자체의 자체적 운동을 만들면서 문명의 자연화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밭과 정원은 자연에서 부터 끌어온 조작이다.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은 조작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자연이라는 집합이 문명을 부분집합으로 삼는다. 그러나 문명은 철저히 자연에 종속된다. 문명이라는 틀로 포섭되는 인간적 활동은 철저히 자연과 비교되어야만 사태를 더 높고 포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자연이라 불릴만한 것 들 중에 산이 있다. 산은 수많은 식물들이 높게 솟은 흙과 돌을 뒤덮은 형태다. 거리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도 있는데, 그 수많은 것들을 단 하나로 보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할 정도이며 수많은 자연물들을 보기위해서는 흙과 돌 위에 서야만 한다.
정원과 밭 위에서 바라본것처럼 그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떠한 유용성도 없는 것은 정원을 닯았고 흙에 집적 접촉되는 흙내음은 밭과 닮았다. 무작위로 심어져 있는 식물들과 햇빛마저 부서져 침투될 정도로 빽빽한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은 커다란 장막을 펼치고 있는 듯 하다. 이 것들을 흔들어대는 바람이 불어온다면 風磬풍경과 같이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바람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심지어나와 비슷한 높이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나보다 몇배는 큰 나무들이 흔들면서 서로 다른 율동을 자아내면서 다른 음율의 바람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식물들이 보금자리로 삼은 수많은 생명체들이 침묵으로 또는 재잘거림으로 일자화 시킬 수 없는 다수성을 만들어낸다. 이 것들을 모두 목격하고 들을 수 있는 그런 정신성이 있다면 이 엄청난 '생명의 약동'에 정신이 붕괴되고 말 것이다. 밭과 정원은 이 지점에서 나타난 것일지 모른다.이 품을 수 없는 혼돈에서부터 문명의 필요성이 나타난다. 아니, 불가피함이 맞다. 어느 순간 자연적인 것과 멀어짐을 가속화시켰거나 결정한 순간이 쏜살같이 찾아왔는지 모른다.
자연의 존재자에 대한 버거움, 그것과 동화 될 수 없고 같아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직감!
거의 무한한 존재자들이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그 압도적인 현상들! 식물의 쥬이상스에 대한 압도!
그 불가능성에서부터 밭이, 정원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다수성에서 부터 파악가능한 것을 떼어내서 그들 앞에 이식시킨다. 이 이식을 통해서 그들의 지성은 자신들의 불가능성을 위로하게 된다.
문명의 탄생이 단순히 인간의 생존을 공고히하기 위한 집단 행위였다면, 생존을 유지하는 선에서만 문명은 유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유지를 넘어선 진보라고 불리어지는 행위들은 생명유지와 자연상태의 종식이라는 설명방식으로는 불충분하다. 자연이 될 수 없는 인간의 운명 그 기이함을 직면하고 그것에 대한 일련의 과정이 작금의 문명이라 한다면, 차라리 이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
이러한 사유과정을 가지고 다시 밭과 정원에 집중해보자.
밭과 정원은 인간의 지성적 작용의 통제하에서 탄생한 산물이다. 이 통제 자체에서부터 자라나는 지성의 작용이 본능적 일체감과 충만함을 야기할 것이라는 기만과 오만이 숨어있다. 그러한 일체감은 지성과 이성의 작용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존재자체가 틈이 필요할 수 있을까? 틈이 아니라 곧바로 나타날 수 있는 것. 굳이 인간의 능력에서 찾자면 '직관'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밭은 에너지를 공급하는 그런 일체감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정원은 위에 설명에 더욱 부합할 수 있을 정도로의 그런 유용성과 생명의 일체감과 떨어져 있다. 적어도 하나의 가설이지만, 정원을 만드는자는 자연을 그리워하는 예민한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밭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지성의 기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설계와 계확하에서 작용하는 감성들이 자연존재자들을 선별하고 구분하며 배치한다. 그들의 자연의 모방은 공백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들이 자연이되지 못하고 틈을 가지고 있는 불안감과 공허함이 정원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태자체에 대한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검열과 이분법적 구조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제는 다시 돌아와 가벼운 사유를 행한 주체 그 자체에 대해서
자세히 논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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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경민이님의 댓글
경민이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저는 엄청 단순하게 생각했는데요. 밭과 정원의 차이는 카시오와 롤렉스의 차이라 생각합니다.
역사는 민석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역사적으로 정원은 아름다운 공간을 넘어, 부와 권력 그리고 문화적인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수단이었잖아요? 이집트의 '주택정원'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정원을 조성하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드러나는 만큼,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죠. 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만 놓고 보더라도 화려함과 정교함을 바탕으로 왕의 강력한 권력을 드러냈잖아요?
5,000평의 과수원과 5,000평의 논을 소유한 사람과 10,000평의 정원을 소유한 사람 중 누가 더 부유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공시지가로 계산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보면 당연히 후자겠죠.
부와 권력 그리고 문화적 우월성이 지성의 높낮이를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밭과 정원의 차이를 바라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