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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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과자와 초콜릿우유를 집어든 다음 계산대 앞으로 향하는 길. 할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사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 계셨다. 어딘가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붉은 얼굴색에 상기된 표정으로 계산대 위에 올려진 빈 소주병 2개와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과 맞닿아 이슬이 살짝 맺힌 차가운 소주병 하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8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허리조차 곧게 펼 힘이 없으셨는지 등과 목은 앞쪽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었다. 낫 놓고 기역 자 모르는 사람 없듯, 이 할아버지를 옆에서 바라보면 기역자 모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소주는 단 한 병. 비닐봉지도 없이 맨 손으로 들고 가려는 듯하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소주가 아닌, 꼬리였다.
누군가는 말한다.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꼬리가 퇴화되었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꼬리가 없는 돌연변이가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여, 꼬리는 없고 꼬리뼈만 있는 인간들로 가득 찬 것이라고. 그런데 지금 여기 편의점에서도 꼬리가 점점 퇴화되는 인간들이 보인다. 무튼, 계산대 앞에서 소주병 하나를 힘 없이 쥔 상태로 계산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꼬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꼬리는 마치 수십 억년 동안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열과 압력을 받았길래, 할아버지의 꼬리는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꼬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꼬리가 완전히 굳어져 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아니다. 축구를 좋아하셨더라면, 2002 월드컵 때에도 이 꼬리는 활발하게 움직였겠지. 그런데 이 꼬리는 지금 왜 이렇게 굳어져 버린 걸까? 지금 이 상황에서 이유를 찾자면면 여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지금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못마땅하신 것 같다. 카운터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만 보느라, 할아버지가 깨끗하게 세척해서 가져온 소주 공병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소주를 들고 집에 갈 생각으로만 가득한데, 아르바이트생은 나무늘보보다 느린 속도로 응대한다. 이를 보면 유연했던 내 꼬리마저도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버릴 것만 같다. 편의점을 지키는 아르바이트생의 존재는 마치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잡초로 뒤덮인 정원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손 좀 봐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존재.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모든 손님들의 꼬리를 단단한 화석처럼 만들어 버릴 위험이 크다.
할아버지의 카운터 앞에 진열된 아기 손바닥 만한 포장지에 담긴 땅콩을 계산대 위에 툭 던진 뒤,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변치 않을 꼬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아르바이트생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얼마여?"
나무늘보 아르바이트생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었는지, 약 3초 뒤에 답했다. 나무늘보 세계와 인간 세계 사이의 시차가 대략 3초인 것으로 추정된다.
"......... 거기 써 있어요."
"2,000원!?"
"....................네"
할아버지는 가격을 듣자 마자, 29유로의 가격표가 붙은 짝퉁 피카츄 인형을 보듯, 언성을 높여 땅콩 가격을 다시 물었다.
"2,000원!?!?!?!?"
"................네."
할아버지의 꼬리는 화석처럼 굳어 퇴화된 상태지만, 시장 감각은 아직까지 생생하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아직까지 땅콩에 미련이 남으셨는지, 1970년대 유신시대 경찰이 시민을 추궁하는 듯한 매서운 눈빛으로 나무늘보에게 재차 물었다.
"이것이 이천원!?"
"......늬웨에에!"
아르바이트생은 대답을 마친 후 할아버지를 빨리 보내고 싶었는지, 나무늘보에서 개미핥기로 변했다. 마치 개미집을 발견하여 끈적한 혀를 개미집 구멍에 이리저리 쑤셔 넣듯, 양손을 계산대에 요리조리 쑤셔 넣어 소주 공병 값을 제외한 소주값을 계산한 뒤, 잔돈을 거슬러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무늘보 세계에서의 시간으로 대략 10분이 지날 때 즈음이었을까? 할아버지는 계산을 마친 뒤 잔돈에 뒤이어 받은 영수증을 마치 의사가 건네준 불치병 선고 안내문처럼 한 번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암회색 바닷속으로 사라지셨다.
할아버지가 암회색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 내가 계산할 차례가 왔다. 나무늘보는 하루빨리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 나는 애플페이로 빠르게 계산해서 사라져 줄게.'
나도 할아버지처럼 꼬리가 화석처럼 단단해진 상태로 계산을 마치고 할아버지가 향한 암회색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단단하게 굳어있었던 꼬리는 지나가는 순수한 아이들을 보며 부드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보면 화석 같은 꼬리는 말랑말랑한 푸딩처럼 모양이 자유자재로 변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눈빛에는 석양과 여명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들의 뽀송뽀송한 살결에서는 마른하늘에 폭풍 같은 장마우가 몰아치기 직전에 풍겨오는 흙먼지 향기를 품고 있다. 바다의 지평선처럼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품고 있는 아이들. 천국과 지옥, 하늘과 바다, 화창함과 쏟아지는 비를 모두 품고 있는 아이들은 꼬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리의 아이는 우리의 꼬리가 단단하게 굳어지지 않도록 이끌어 준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쩌면 할아버지와 나뿐만 아니라 주위 많은 사람들도 꼬리가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가는 건 아닐까. 물론 아이만이 꼬리가 화석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건 아니다. 꼬리는 딱딱한 사람 앞에서는 화석처럼 딱딱해지고, 부드러운 사람 앞에서는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서양 사람들은 가벼운 안부 인사를 할 때도 2개의 꼬리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다. 출근길 바쁜 시간 대에는누군가를 앞질러가기 전 자동차 깜빡이를 켜듯 "Excuse Me" 를 조용히 말하고 앞질러 간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탑승하는 몇몇 사람들은 생판 모르는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들며 가벼운 안부를 전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캐릭터 헬로우 키티처럼 예쁘장하게 꾸미고만 있을 뿐, 꼬리는 단단하게 굳어 있다.
일단 내 꼬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오늘부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연습 좀 해야겠다.
일단 아침 좀 먹고ㅋㅋㅎㅋㅎ
아 근데 아침 뭐 먹지..;;;;;;;;
돈가스 먹고 싶은데 돈가스 가게는 다 문을 닫았네;; 사장님들이 돈 벌고 싶지 않으신걸까?
(다시 꼬리가 굳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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