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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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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민석 (175.♡.230.114)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7,616회   작성일Date 24-07-07 00:21

    본문

    존재자의 존재가 절뚝 거리며 걸어간다.

    존재자와 존재가 일치됨을 바라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과제와 염원이 되었을 정도로 있어왔던 것은 있어야 하는 것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있어왔던 것은 있어야 하는 것들에 있음을 물려주었으나 '어떻게' 있음의 문제는 그 자신도 감당하지 못한다....
    '어떻게'라니!
    다시 말해,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니! 이것이 진정으로 의문이다! 있어왔던 것은 이 이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부채에 묶여 있을 정도로 물려주었던 행동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한편, 있어야 하는 것에 있음은 철저히 있어왔던 것에 의해 나타나고 이 있음 자체에 어떻게라는 지극히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침투한 채 안정적이 었던 이자관계를 흔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로 있음 그 자체에 어떻게라는것이 필요하기나 한 것일까?
    분명히 있음의 문제 속에서 '어떻게'는 불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필요없어 보이는 것이 정말로 필요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타났을 때, 그 필요라고 불리어질 만한 무엇인가가 아닌 필요 자체에 대해서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가능함이 즉, 물려줌을 통한 이자관계의 붕괴와 그로 인한 제삼자의 이질성을 개입시키는 것 아니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있어왔던 것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에 의해 변질되고 또 있어야 하는 것이 그 변질과 더불어 세계 자체에 대한 변화에 적응하는 것으로 맞물려져 있다....
    오, 있어왔던 것들의 그 무구한 과거의 영광을 어디선가 잃어버린채 편집증 환자처럼 환상으로만 이따금씩 마주하고
    그것과 더불어 있음과 더불어 어떤 확신과 안정을 담보받은 있어야 하는 것들이 그 담보가 불안정함을 직시하자 행해야만 했던 존재문제의 필요성!
    과거의  천상에 던져진 모든 동경과 시샘의 눈빛은 끌여내려져 더 이상 지상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지상을 긍정했던 시선은 결국 감당 못한채 지하에 묻어두고 그것이 있었던 기억만을 가진채 지상의 것이 전체인 것처럼 천상에 던져진 눈빛이 이제는 지상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자기기만속에서 지상은 그려지고 있다.
     이 출구없는 현실을 즉, 생존이냐 존재냐의 보이지 않은 투쟁 속에서 이 투쟁을 끝내는 아니 그것을 수면위로 끌어올려 명확하고 확고한 행동으로 이끄는 혁신적 사고와 행동이 요구된다!
     있음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대적자를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 대적자는 철저히 있어야하는 것에 있음에 달려 있다. 어떤 있음은 하늘을 바라보고 또 다른 있음은 지하의 투쟁을 외면한채 표면위에 서성거리는 것에 존재감을 느낀다.
    (진정으로 분열속에서 소외속에서의 풍선과 같은 존재자들은 자신이 풍선과 같이 떠돌아 다니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는 자들에 냉소를 보내면서 이리저리 있어야만 하는 곳을 찾는다. 그러나 그 냉소가 자기자신이 투사된 대상이라는 것을 진정 알지 못하겠는가? 이들은 언제든 머리카락만큼 얇은 실오라기를 쥘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자신의 부유를 완전히 끝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진정 현대에 맞는 '구원'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소원적 구원은 없었다. 차라리 구원을 바라면서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그가 진정한 현대인 아니 미래를 도래시킬 천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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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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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만이님의 댓글

    경만이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참 어렵네요.

    존재자와 존재 관계는 자기 인식과 자아 실현으로 보면 될까요?
    어떻게라는 질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건 존재하는 방식으로 보면 될까요?
    있어왔던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은, 변증법적 과정에서 새로운 정반합의 단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보면 될까요?
    변질과 적응은 존재가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으로 보면 될까요?
    생존과 투쟁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있어야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로 보면 될까요?
    대척자는 변화를 야기하는 외부의 요소나 내부 갈등으로 보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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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석님의 댓글의 댓글

    김민석 아이피 (223.♡.210.97) 작성일 Date

    확언을 드릴 수 없지만, 대부분 동의하는 바 입니다.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몇가지 첨언한다면.......

    오늘날에는 '자아'라는 단어 자체가 순진한 발생이 되었습니다.동시에 '나'라는 단어도 매우 어색해지는 것이됩니다.
    하지만, 정신병에 걸리고 싶지 않다면(물론 그것은 의식적으로 조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것을 붙잡을 수밖에요.
    주체의 문제에서만 해도 개인 그 자신이 '나'라고 멸시하고 자신하며 확신하는 것이 얼마나 많고 많은 것을 기억속에서 자신을 직조하고 편집하며 그것 중에서 어떤 부분을 환상적 성애적인 흐름을 통해 '생각'해내는 지....
     더군다나 거기에 타자가 개입하면 그 한명의 인간을 바라볼 때 무한대에 가까운 그리고 하찮은 존재가 겹쳐보이는지!
    인간은 정말 어려운 존재자입니다. 물론, 자연도 마찬가지 입니다. 괜히 옛사람들이 신적 존재를 끌고 오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분명히 성숙해지고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인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이 협소해지고 좁아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마치 일부로 거부하고 그 거부 속에서의 협소한 기쁨만이 전부 다인것 처럼 말이죠.
    변증법적으로 즉자(An sich)가 대자 (für sich)를 만나지만 그 만남에서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이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아 이것은 개인적으로 너무 기대되는 작업이 되겠는데요. 어쨋든 다시한번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