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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 90년대생들의 비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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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변지선 (77.♡.246.46)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321회   작성일Date 24-04-03 04:57

    본문

    사이버 망령

    영택이는 웹서핑을 하다 흥미로운 해외 기사를 봤다. iot 기술을 활용한 도시 문제 해결 공모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여학생의 이름이 매우 익숙했다. 대략 10년 전이었을까? 아니다 그보다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과거 영택이가 핵티비스트로 활동할 당시 마주쳤던 여성임을 직감했다. 그는 직감에 모든 것을 위탁한 채로 해당 공모전과 관련된 자료를 찾고 찾고 찾았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발견했다. 영택이가 발견한 그녀에 관한 모든 사진은 후줄근한 옷차림에 낡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목과 허리는 마치 장애가 있는 듯 곱추처럼 살짝 굽어 있었다. 영택이는 자신이 알던 그녀가 아니길 바라며, 찾아선 안 되는 개인정보를 깊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영택이가 초등학교 4~6학년 정도 되던 시기, 이메일을 통해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게 유행이었다. 하루는 예기치 않은 메일 한 통이 그에게 충격을 안겼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제목의 메일을 확인하자, 성인 남녀가 알몸으로 얽혀있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 사이트 광고 스팸 메일이었다. 어린 영택이는 그 풍경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영택이는 남성이었기에 남성의 신체는 알고 있었지만, 여성의 신체는 그에게 낯선 세계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만큼 여자와 남자는 신체적 특징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본 적은 처음이었다. 특히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신체 안으로 들어가 괴롭히는 듯한 모습은, 여성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때의 충격때문일까? 영택이에게 섹스란 여성을 아프게 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영택이의 생각은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지속되었다. 그렇다 보니 핵티비스트 활동을 할 때 마주하게 되는 아동 포르노의 피해자는 단연 어린 여성이라 단정 지었고 모든 남성들을 범죄자 취급을 하였다. 그렇게 영택이는 아동포르노 남성 유포자들의 신상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며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고자 열렬히 선동했다. 그렇게 해당 국가의 수사기관은 영택이가 조성한 강한 여론에 짓눌려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금의 영택이를 사이버 망령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19세 남성이 12~13세 정도의 여자 아이와의 관계한 영상을 유포했고, 영택이는 19세 남성의 개인 신상을 확보한 다음, 피해자인 여자 아이에게 연락을 취하여, 그 남성을 엄벌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영택이를 뜯어말렸다.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도 있지만, 지금은 그에게 차인 상태여서 부끄럽다는 게 이유였다. 그녀는 그에게 차인 것도 부끄러운데, 그와의 관계까지 부모님에게까지 드러나는 것이 더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지금은 조용히 쥐구멍에 숨어 있는 상태로 그의 머릿 속에서 조용히 잊혀지길 바랄 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영택이의 마음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녹을 기미가 없어 보이는 거대한 빙산과 같았기에, 그녀의 간절함에 녹을 일은 없었다. 영택이의 생일은 봄이고, 항상 따스한 햇살과 개나리, 개구리의 노랫소리, 나비의 춤사위를 그리워하고, 반가워 했다. 그런데 왜 그때 당시의 영택이는 그리 차가웠을까. 그렇게 영택이는 그녀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모든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행했다.

    영택이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과거의 생각을 되짚으며, 공모전에서 수상한 그녀의 정보를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녀의 허리가 굽은 이유는 어린 나이에 6층 높이의 건물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건지, 사고로 떨어지게 된건지 모르겠으나, 낙상으로 인한 척추 손상으로 허리가 굽은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다. 영택이는 그녀에게 낙상 사고가 발생하게 된 시기와 영택이가 연락을 취했던 시기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핵티비스트 시절 연락을 취했던 아동포르노 피해자인 그 아이라는 추측이 더욱 선명해졌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와 관련된 자료를 찾고 찾고 찾을 때마다 그녀임이 점점 확실해졌다.
    그 순간 영택이의 모든 생각과 식욕, 수면욕, 성욕은 사라졌다. 모든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눈물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영택이가 할 수 있는 건, 숨을 쉬는 것과 눈물이 흐를 때마다 조용히 닦는 것뿐.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일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영택이가 그녀의 의견을 무시하고 행동을 감행한 궁극적인 목적은 그녀의 삶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지길 바랬을 뿐이다. 대신 보복을 해주고, 그녀가 통쾌함을 1초라도 품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사진 속 모습은 항상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으며, 꼽추처럼 허리가 굽어 있었다. 굽은 허리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삶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택이 자신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못이겨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자라도 깨끗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모자도 세탁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는지 구질구질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영택이는 그녀의 이메일 주소부터 개인 정보를 모두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알게 된 집 주소로, 캡 모자를 보냈다. 뉴에라 브랜드를 시작으로 몽클레어, 메종키츠네, 셀린느, 프라다까지 5개의 모자를 보냈다. 그녀의 삶은 아름답지 않아도 모자라도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걸로도 부족했다. 영택이는 그녀에게 좋은 향기가 맴돌아 조금이라도 좋은 기운이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샤넬 코코 마드모아젤 향수를 익명의 편지와 함께 선물했다.

    그녀의 이메일을 들여다보니, 생애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큰 마음을 먹고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여행을 2주 코스로 계획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유럽 각국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꿈이었는지, 그녀의 구글멥은 유럽의 각종 유명 식당들을 체크해 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후줄근한 모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경제적 상황은 좋지 않았다. 영택이는 그녀가 체크해놓은 식당들이 그림의 떡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영택이는 사이버 망령처럼 그녀에게 익명의 메일을 보내 연락을 취했다. 바라는 건 하나였다. 그녀의 첫 유럽여행이 아름다워지는 것.

    "나로 인해, 너의 1초가 행복으로 채워질 수 있길 바란다. 난 너의 행복을 빌고 있다. 이번 공모전 1등이란 좋은 소식을 들으니 나도 행복했다. 네 행복과 네 삶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모자도 향수 모두 내가 보낸 것이다. 난 너의 여행마저도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 여행 캐리어 가방부터, 여행에서 입을 옷까지 모두 선물할 예정이다. 너의 여행 코스를 나에게 전해준다면, 코스에 적합한 숙소도 모두 예약해 주겠다. 물론 난 거지니까 고급 호텔은 기대하지 않길 바란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다. 내가 여행 경비의 대부분을 부담할테니, 네가 계획해놓은 여행경비는 먹고 싶었던 것, 경험하고 싶었던 것에 모두 쏟길 바란다. 그렇게 나로 인해 네 시간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지길 바란다. 물론 넌 내가 무서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보낼 선물들을 보고 주위를 관찰해 봐라. 너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을테니까. 네가 나에게 보답해야 할 건 없다. 네 여행이 행복하면 된다."

    그녀가 유럽 여행을 떠나기까지 대략 40일 정도가 남은 상태. 영택이는 그녀의 소중한 짐이 견고하고 아름다운 함에 담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평소 장바구니에 넣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900 달러의 캐리어 가방을 시작으로 그녀가 갖고 싶어서 핀터레스트 보관함에 넣어놓았던 바라클라바, 치마, 바지, 블라우스, 티셔츠, 코트, 장갑, 양말 등을 차례차례 보내기 시작했다. 그다음 그녀가 영택이에게 보내준 여행 코스를 바탕으로 하여 숙소를 차례차례 예약했고 예약 코드를 그녀에게 모두 전했다. 그녀는 자신을 따뜻하게 응원해 주는 영택이의 메시지에 감동을 받았는지, 마치 자신을 키워주는 부모님 같다며 장문의 감사 메시지를 영택이에게 전했다.

    그렇게 영택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큰 사치를 경험했다. 그녀가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결제했던 모자와 향수 그리고 캐리어 가방과 각종 옷, 잡화, 숙박비 결제 내역을 보니 약 9천 달러에 가까웠다. 달러 가치가 높을 때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돈이 나갔다. 이로 인해 영택이가 이용하는 카드사에서는 보이스 피싱으로 의심했는지, 해외결제 차단과 함께 긴급 전화가 오기도 했다. (이 긴급전화 덕분에 영택이는 이 카드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영택이는 이 지출이 아깝지 않았다. 단순 그녀를 향한 미안한 마음,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강한 자책은 아니다. 현재 자신의 모든 욕망을 빼앗아가 버린, 출처 없는 우울감을 해결할 방법을 자신에게 묻고 묻고 되물은 끝에 이 방법이 유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 2주에 달하는 그녀의 유럽 일정을 마치고 나서, 영택이는 그녀와 조금 더 길게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텔레그램 아이디를 보냈고, 전화를 하게 되었다.

    "안녕. 혹시 나 알려나? 그때의 나야. 너 맞지?"
    영택이는 그녀와 있었던 사건과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다. 그러자 따뜻하고 다정했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지금 너무 소름이 돋아요. 저를 어떻게 아셨어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그쪽이 반대로 당했다면 어땠을 거 같아요? 저 정말 무서워요. 제 모든 정보 다 지워주세요. 부탁할게요"

    그렇게 그녀는 두려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전화를 뚝 끊었고 영택이가 메시지를 보내도 약 1주일 동안 답장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영택이의 우울감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울감은 더욱 거세졌다. 그렇게 영택이는 그녀에게 다소 거친 장문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동안 받았던 선물을 생각해봐. 그리고 난 너의 집 주소까지 모든 걸 알고 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을 거야?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래! 그렇게 해봐! 난 네 여행이 행복했는지만 묻고, 모든 정보는 지운 뒤에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리고 하루 뒤에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저 너무 무서워요. "
    "맞아. 무섭겠지. 그런데 지금 내 이야기 좀 들어줘. 전화하자. 나쁜 말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영택이는 전화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5분 동안 흐느끼며 옹알이만 했다. 그녀도 영택이의 울먹임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졌는지 함께 울먹이면서 무슨 일인지 되물으며, 영택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줬다. 영택이는 눈물을 어느 정도 흘려보내고 난 뒤, 마음을 진정시키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읊조렸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어. 난 네 삶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지길 바랐을 뿐이야. 물론 내가 이렇게 접근하는 거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 알지.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난 매일매일 우울감에 찌들어 눈물만 흘리며 살아갈 것 같았어. 난 이 문제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고 싶었고, 지금 내 부족한 생각에 의하면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네가 행복한 모습을 1초라도 볼 수 있다면, 난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나를 이해해 줘."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그쪽이라면 얼마나 소름이 돋겠어요?"
    "미안해.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저도 무섭고 힘들었다고요."
    그렇게 둘은 약 5분 동안 서로 울먹이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영택이도 이러한 대화가 진전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것보다 유럽 여행은 행복했니? 맛있는 건 많이 먹었고? 난 그 한 마디만 들으면 될 것 같아."
    "아니요. 재미없었어요. 할머니랑 같이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못 먹었어요."
    "아 그랬구나. 그런데 정말 미안한데, 나로 인해 2주라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재미있었다고. 내가 사준 캐리어, 향수, 모자, 옷, 치마 등을 입고 여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거짓말이어도 좋으니까."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행복했어요."
    차분하게 전한 그녀의 말을 들은 영택이는 다시 5분 동안 흐느끼며 울었다. 그녀는 영택이의 마음을 이해해준 것인지, 과거의 영택이를 용서해 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5분 동안 영택이의 흐느낌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덕분에 영택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영택이는 이 전화로 그녀의 시간이 채워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마무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나 이제 해결된 거 같아.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난 네 삶이 더 나아지길 바랬을 뿐이야. 그동안 보냈던 선물도 그렇고. 난 네가 행복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 단지 그것뿐이야. 그리고 이제 걱정하지마. 네 정보 모두 지울거야. 연락할 일도 없을거야."
    "믿을게요. 저도 정말 고마웠어요."
    "그래. 난 네 삶이 더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어. 난 항상 널 응원할거야. 하지만 이제 선물을 보낼 일이 없겠지. 네 모든 정보를 지울 것이고 찾을 일도 없을테니까. 전화는 내가 먼저 끊을게. 넌 손가락도 까딱하지마. 넌 그대로 편하게 잠자리에 들면 되는거야."


    짧게 통화한 것 같았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영택이는 그날, 한을 푼 귀신이 하늘로 승천하듯이 꿈의 나라로 평화롭게 떠날 수 있었다. 영택이가 우울감을 느끼는 짧은 기간 동안 몸무게는 약 7kg가 빠졌는데, 전화를 마친 이틀 뒤에 거짓말처럼 식욕이 살아나, 그 주에 몸무게가 약 8kg 가량 불어난 뚱뚱이가 되었다.


    영택이가 그녀에게 커다란 죄책감과 미안함을 품게 된 계기는 아마 영택이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견고한 빙산에 균열을 일으킨 두 지식인과의 만남일 것이다. 영택이가 핵티비스트로 활동할 당시 자신의 부족함을 매일마다 마주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탈출구를 잡지식 쌓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공 수업은 듣지도 않고, 다른 학교의의 교양 수업을 몰래 듣는 시간을 주로 가졌다. 영택이의 친구 몇몇은 그런 영택이를 흥미롭게 여겼는지 영택이가 재미있어 할 만한 수업에 초대해주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영택이는 본인이 들어야 하는 수업과 과제, 시험은 내팽겨치고 다른 친구들의 교양수업을 대신 출석해 주고 과제와 시험까지 치르게 되었다. 그렇게 영택이는 수도권에 위치한 여러 대학교를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연세대학교의 "연극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진행한 M교수님은 영택이의 빙산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분의 첫인상은 그 분의 성함처럼 괴짜 냄새를 풀풀 풍기고 계셨다. 치아 건강이 좋지 않으신지 발음은 이 사이사이로 새어나가, 귀에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영택이는 도강임에도 불구하고 앞자리에 앉아, 이 사이로 새어나가는 희미한 말 마저도 귀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괴짜 같은 그 분의 성함과 달리 언행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예를 들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할 때마다 "ㅇㅇ일보의 ㅇㅇㅇ 기자, ㅇㅇㅇ 기사에 따르면, 방금 내가 했던 말과 똑같이 했다." 같은 형식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서 전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온전히 전하는 데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수업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실 때는 달랐다. 발음은 이 사이로 새어나가지 않고 확실하고 명료하게 다가왔다. 무언가를 강하게 전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영택이는 누군가를 대신하여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기에 M 교수님의 눈에 띄어선 안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택이는 수업이 끝난 뒤에 교수님에게 달려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아동 포르노와 섹스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마 내가 이렇게 깨어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의 돌아온 대답은 대한민국에 발생했었던 '빨간 머플러 사건'이었다. 그다음 이어지는 교수님의 말씀은 영택이의 빙산에 균열을 발생시켰다. 이어서 당시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현 노장철학 대가의 한 마디는 균열이 발생한 빙산에 봄 바람을 일으켰다. 다음은 영택이가 기억하는 철학자의 말이다.
    '노장사상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절대기준을 설정하거나, 어떤 기준을 토대로 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세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철학적 자산이다."

    "연극의 이해" 라는 교양 수업의 중간고사는 야설 쓰기였는데, 영택이는 그동안 꽁꽁 얼어있던 섹스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는 도전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내 학점도 아니니까. 그렇게 영택이는 섹스는 여성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며, 아동 포르노의 모든 피해자는 여성 아동이 아닐 수 있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물론 영택이는 이공계에 공대생이었기에 재미있는 글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M 교수님은 영택이의 노력을 기특하게 여기셨는지 A+ 학점을 주셨다. 덕분에 영택이는 도강을 부탁한 친구에게 더욱 당당할 수 있었다.

    당시 영택이는 도강을 통한 두 지식인과의 만남을 바탕으로 가슴 속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던 빙산이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슴 속에 아버지를 여러 명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영택이는 자유시장 경제를 악으로 여겨 외면하고 있었지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가슴 속의 아버지로 품기 시작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외면해왔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까지 가슴 속 아버지로 품으며 생각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슴속에 품게 된 아버지는 27명 정도가 되었으며, 평소 품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어머니 7명까지 가슴에 품게 되었다.
    과거의 영택이는 자신이 정해놓은 길이 무조건 진리였던 것이었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직 계몽이 덜 되었으니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품으면 품을 수록 절대 녹을 일이 없어보였던 견고한 빙산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빙산이 있던 자리에는 개나리가 피었고, 개구리가 노래를 불렀으며, 나비는 나폴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여러 아버지와 어머니를 품게 된 영택이는 자신이 핵티비스트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또렷해졌다. 맹렬한 태양이 불타오르는,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모래 언덕에 개나리가 피어나고, 개구리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나비의 춤사위가 그려질 수 있도록. 그곳에 봄바람이 더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부채질을 하는 것.

    영택이는 부채질을 열심히 하다, 그 다음 해에 조용히 활동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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