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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설 보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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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경민이 (218.♡.110.45)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443회   작성일Date 24-06-16 17:2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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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사진은 약 4년 전 익명의 유저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할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내가 어렸을 때 만난 할아버지들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느라 모든 것을 소모하여, 지혜만 남겨진 신비로운 존재에 가까웠다. 마치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금도끼와 은도끼를 모두 건네주는 산신령 같은 존재,. 전래동화에서도 볼 수 없는 민담을 끝도 없이 풀어주는 이야기 보따리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대중교통에서 야설을 보고 있는 할아버지의 사진은 내가 어렸을 때 만난 할아버지와는 전혀 달랐다. 어쩌면 이게 현실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인터넷 커뮤니티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이런 걸 왜 찍어 올리냐", "불법촬영이 더 문제다", "소설인데 뭐 어떠냐", "19금 소설 중에서도 괜찮은 거 많다", "굳이 남의 핸드폰을 훔쳐봐야 하냐?"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물론 커뮤니티마다 성향이 다르다. 그래서 어떤 커뮤니티는 나이값을 못한다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노인은 전통적으로 존경의 대상처럼 여겨져 왔다. 그래서 야설을 보는 할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불태운 게 아닌, 아직도 무언가를 소진시키지 못해 갈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 힘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 답을 문화 콘텐츠에서 찾았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박범신의 소설 <은교>가 있다.


    <은교>에서 이적요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노인이 품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랐다. 그는 욕망에 젖은 상태로 은교에게 접근한다. 이 이야기는 노인의 성적 욕망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그러한 욕망이 공개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파장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가진 성적 욕망은 종종 감추어지거나 억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은교>에서 그려진 이적요는 달랐다. 오히려 사회적 기대와 노인 개인의 내면적 욕구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었다.


    소설 속 이적요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통해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에 대해 철학적 사색을 한다. 그의 욕망은 단순한 육체적 갈망을 넘어서, 존재의 근원적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대표적이다. 이적요의 내면적 고민은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의 정당성과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적요와 은교의 관계는 노인과 젊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세대 간 오해와 편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인의 이미지가 오로지 지혜와 연민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는 것에 도전하며, 노년기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적 욕망과 본능을 그렸다.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노인은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회에 던졌다.


    <은교>는 노인의 음란한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욕망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을 포착하고, 독자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이끌어주었다. 덕분에 노인과 젊은이, 사회와 개인 그리고 도덕과 욕망 사이의 경계에서 우리는 한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경계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은교>로만 이야기를 하기에는 다소 부족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잠자는 미녀>에서도 노인의 욕망을 발견했다. 에구치라는 노인은 말년에 접어들어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잠자는 미녀의 집'이라는 곳을 찾아간다. 이곳은 노인들이 젊은 여성들과 일방적인 성적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여성들은 잠들어 있고, 무방비한 여성의 상태는 에구치에게 젊음의 환상을 선사한다.


    노인 에구치의 내면은 다소 복잡하다. 젊은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과거의 기억과 젊은 시절의 욕망을 되살린다. 하지만 그 욕망은 충족될 수 없으며, 결국 고독과 죽음에 닿게 된다. 에구치는 젊은 여성의 몸을 탐닉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죽음을 응시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여기서 인간의 욕망과 그 끝에 닿은 죽음이라는 허무를 직시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답게, 추잡하게 다가올 수 있는 노인의 음탕함을 서정적이면서도 암울한 문제로 다뤘다.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변태 노친내가 아니라, 에구치라는 노인의 비극성을 극대화시켰다. 이는 노인이 음란해도 된다는 당위를 주장하는 게 아닌,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금 들춰보게 하여 대중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노년의 성적 욕망이라는 주제로 인간의 삶이 일시적이고 허망하다는 것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죽음과 삶 그리고 젊음과 늙음, 미와 추의 경계에서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만들어주었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4년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버스에서 야설 보는 할아버지" 를 향한 긍정적인 반응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박범신 그리고 마광수의 문화적 자산이 아닐까.

    그들의 예방접종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면역이 갖춰진 반응이 가능했을까. 그런데 왜 야설 보는 할머니는 없을까?


    우리 세대는 자유와 풍요로움을 선물해준 윗 세대에게 경제적 풍요로움과 아늑한 노후를 보답하고 싶다. 물론 보답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이 문화적 자산 만큼은 끝까지 지켜나가며 아름답게 가꿔나가야 하지 않을까. 






    역시 운동을 하니까, 잡생각이 잘 떠오른다.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가는 신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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