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과 다카스기 신사쿠 – 공산사와 사쿠라야마 신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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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에서 제일 관심이 가는 인물이 다카스기 신사쿠였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80명으로 거병을 일으켜 메이지 유신을 시작하게 된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메이지유신의 시작과도 같은 인물이다. 일본에서 다카스기 신사쿠의 여정을 따갈 때 마다 전봉준이 떠올랐다. 전봉준은 백성이 주축이된 농민군을 시작으로 연합농민군 8000명을 결성하고 4대 행동강령을 주문처럼 외우며 전투를 시작한다. 다카스기 신사쿠도 기존 사무라이가 중심된 군대가 아닌 일반 백성을 모아 기이한 군대인 기병대를 만든다. 그러나 80명으로 시작한 신사쿠의 기병대는 성공했고 8000명의 전봉준은 실패했다. 신사쿠의 거병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시작 할 수 있었고 전봉준이 부하의 밀고로 붙잡히면서 조선의 개혁의 기회도 사라진다. 신사쿠는 왜 성공할 수 있었고 전봉준은 실패 했을까? 신사쿠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전봉준이 같이 떠올라 슬프다는 말로는 부족한 감정이 밀려왔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수 있는 힘이 없던 정부는 청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일본은 외세의 힘을 끌여들이지 않고 권력을 내려 놓는 대정봉환을 결정한다. 이건 마치 고종이 청군을 부르지 않고 전봉준에게 정권을 양보한것과 같다. 고종이 전봉준에게 대정봉환을 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오히려 조선의 대정봉환은 전봉준이 한다. 전봉준은 외세의 침략을 걱정해 집강소를 설치하고 시세를 살피며 뒤를 도모한다. 그러나 결국 서양식 무기와 농민들의 무기 차이는 농민 학살에 가깝게 끝이나며 농민군은 궤멸된다. 권력자의 근시안적인 결정이 얼마나 국가에 큰 손실을 가져오는가? 고종의 그 결정으로 겨우 몇 년 권력을 지속 했을 뿐 결국 조정도 백성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언제나 고통을 더 감내해야 하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다.
공산사는 신사쿠가 80명의 거병을 시작한 작은 절이다. 일본은 공산사 거병을 카이텐, 회천回天이라고 표현했다. 신사쿠도 80명의 거병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늘의 마음을 돌려아 겨우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보다는 죽더라도 완성해야 하는 소명으로 여기며 거병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니 거병을 카이텐, 하늘의 마음을 돌린다는 뜻의 회천回天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카이텐으로 인터넷검색을 하면 인간어뢰가 먼저 나온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때 사람이 안에 타고 조종하는 인간어뢰를 카이텐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결국 가미가제 행운의 신풍은 자살 특공대로 신사쿠의 간담, 용기의 회천은 자폭병기로 만든다.
사쿠라야마 신사에 가면 신사쿠 기병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초혼장이 있다. 신사쿠의 비석만 조금 더 높여 구별을 두었을뿐 기병대를 만들 때 평등을 강조한 신념대로 비석은 지위 관계없이 같은 높이에 있었다. 그러나 이 초혼장은 나중에 야스쿠니 신사의 모태가 된다. 일본여행을 할 때 신사에 방문하게 되면 바람을 적기도 하는데 조심해야 한다고 최진석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교수님 표현을 빌리자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자.’ 일본에게 배워야 할 것 은 배우지만 내가 누구에게 소원을 비는지 알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하늘의 마음을 돌릴 정도의 용기의 回天은 이제 더 이상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결국 잘못된 제국주의의 역사 왜곡은 주변국가들을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빛나는 역사마저도 왜곡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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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9등급님의 댓글
한국사 9등급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1편에 이어 2편까지 전봉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더 궁금해지네요. 덕분에 저도 동학농민운동을 더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