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용법을 읽고 (조르주 페렉, 김호영(옮긴이) 문학동네 2012)
페이지 정보

본문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의 저자 김형효는 서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400자 원고지 본문만 1,299장을 써서 탈고하였다."
이는 내 망상이지만, 1,299라는 숫자는 의도된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쓰고자 하는 내용은 1,332 장 쯤이었는데, 저자가 어느 시점에서 의식적으로 1,299장으로 줄인 것이다. 그냥 탈고하다보니 1,299장이 된 것이라면, 굳이 서문에서 1,299란 숫자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학, 예술적 감수성의 중요성을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읽은 사람은 내 망상을 공감해줄 것이다.
왜 <인생사용법>이냐?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인생사용법>이 떠오른다. 공통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다. 구조주의, 프랑스, 1,299라는 결여.
구조주의는 완전한 체계를 꿈꾸면서도 완전성이 불가능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사상에 가깝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의 심층 구조를 들여다 보았지만, 신화는 끝없이 변형되었다. 라캉의 욕망은 대상을 얻는 순간 다른 대상으로 이동하고, 푸코의 에피스테메는 어느 순간 단절되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 구조주의의 논리는 설명되지 않는 나머지, 빠져 나가는 잉여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다. 그것이 구조주의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의 저자인 김형효도 구조주의가 매력적이었기에 1,300장도 1,295장도 아닌 1,299장을 썼을 것이다.
<인생사용법>도 다르지 않다. 이 소설은 100개의 장으로 완성되어야 했다. 하지만 66번째 장이 처음부터 탈락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소설은 99개의 장으로 끝난다. 건물 평면도 왼쪽 하단 방 하나는 끝내 묘사되지 않는다. 주인공 바틀부스는 500개의 퍼즐 중 439번째에서 죽는다. 조각이 맞지 않은 채로. 페렉은 완전한 체계를 설계해놓고, 그 체계에 결여를 심어놓고, 그 결여와 함께 소설을 끝낸다.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1,299라는 숫자 그리고 <인생사용법>의 99라는 숫자는 다르지만 같은 성격을 품고 있다. 하나가 모자르다는 것, 채워지지 않는 것 그리고 의도된 공백.
구조주의를 문학적으로
구조주의는 인간의 의식이 세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조가 인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언어가 사고를 앞서고,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구조의 효과라는 것이다. 이를 1,299장으로 쓰면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이 되고 소설로 쓰면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이 된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인생사용법>이 완벽한 구조주의의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당시 노벨문학상도 받지 못했겠지.
<인생사용법>은 파리 17구의 가상 건물인 시몽크뤼벨리에 거리 11번지를 무대로 삼고 있다. 건물의 단면을 체스판처럼 구획하였고, 기사의 이동규칙에 따라 방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보여준다. 각 방에는 인물과 사물 그리고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페렉은 그 무엇도 판단하지 않는다.
최진석 교수님은 판단하지 않고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인생사용법>은 이 문법을 매우 충실하게 따른다.
보몽 부인의 거실에는 커다란 콘서트용 피아노가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악보대 위에는 아서스스탠리 제퍼슨의 팝송 악보가 놓여 있다. 소파 곁에는 팔각형 대리석 탁자가 있고, 철제 라이터와 분재 화분이 그 위에 놓여 있따. 바닥에는 가장자리를 다 맞춘 나무 퍼즐 하나가 놓여 있다. 퍼즐 왼쪽에는 장식 쟁반이 있고, 그 위에는 커피 주전자와 잔과 받침, 영국제 금속 설탕 그릇이 놓여 있으며, 쟁반의 그림은 물건들 때문에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다.
만약 위 내용을 내가 썼따면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보몽 부인의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깨닫게 된다. 이 방의 주인이 피아노라는 것을. 피아노가 방을 소유하고 있었고, 나머지 가구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인 지 오래인듯 구석으로 물러나 있었다. 바닥에는 퍼즐이 있었다. 가장자리만 완성되어 있었는데,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반면 페렉은 다르다. 왜 피아노가 거실을 점령하고 있는지, 왜 보몽 부인이 팝송 악보를 펼쳐두었는지, 분재를 왜 키우는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볼 뿐이다.
레올 부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백화점에서 침실 세트에 반해 24개월 할부로 구입한다. 이자 13.65%, 매달 941프랑 31살팀. 이는 월급의 30%에 해당한다. 이후 그들의 삶은 봉급 인상을 둘러싼 관료제의 미로를 헤매는 데 소진된다. 과장은 늘 부재하거나 바쁘다. 출장과 산악 스키, 세미나, 슬라이드 상영회, 결국 허가가 날 때는 이미 차압 직전이고, 승진은 경매 통지서가 건물 현관에 붙은 날 날아온다. 페렉은 이 이야기를 아주 꼼꼼하고 담담하게 서술한다. 분노하지도 않고 연민도 내색도 없다. 다만 절차와 날짜와 금액과 관계 없이 관계를 정확하게 기록한다.
윙클레가 죽은 방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을 때 남는 것들이 남아 있다. 광고지부터 지난 호 잡지, 시든 들꽃 세 송이, 빈 코카콜라병, 문 뒤에 걸린 Y자 모양의 금 간 거울. 페렉은 이것들을 하나씩 호명한다. 거울 틀에는 팔을 뻗어 횃불을 들고 있는 일본인 육상선수의 우편엽서가 아직 끼어 있다. 왜 그 엽서가 거기 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냥 거기에 있다.
<인생사용법>은 판단하는 게 아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지금 있는 것을 기록한다. 그는 사물 하나, 색깔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크롬으로 도금된 금속 고리, 스텐실로 인쇄된 세 가지 그림, 반으로 갈라진 둥근 빵, 손잡이 없는 총 모양의 구리 그릇. 독자의 입장에서 이 구구절절한 설명은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읽다보면 이 끊임없는 설명이 곧 그 사람의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침실세트로 고생하는 레올, 평생 퍼즐을 맞추는 바틀부스, 아파트를 팔러 온 부동산 직원, 빈 방에 남겨진 광고지를 모두 동등한 무게로 다룬다.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가리지 않는다.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읽었을 때, <인생사용법>이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생사용법>은 구조주의를 문학적으로 표현했을 때 드러나는 형태에 가깝다는 것이다.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에서 설명하는 레비 스트로스가 신화의 표면적 서사 하에 무의식적 구조를 읽으려고 한 것처럼, 페렉은 일상의 사물과 삶 아래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그 사물들 자체의 배열로 드러낸 것이다. 섣부른 판단은 오히려 질서를 흐릴 수 있기 때문에 페렉은 판단하지 않고 본다.
어떤 내용이냐?
<인생사용법> 중심에는 바틀부스가 있다. 그는 영국인이고 상속받은 재산으로 평생 살 수 있다. 어느 날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이를 충실히 이행하기로 한다. 10년 간 수채화를 배우고, 20년간 전 세계를 돌며 500개의 항구를 그리고, 그 그림으로 윙클레가 제작한 퍼즐을 20년에 걸쳐 맞추는 것이다. 퍼즐이 완성되면 그림을 원래의 흰 종이로 복원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완벽하게 무상한 삶을 설계한 것이다.
하지만 439번째 퍼즐 앞에서 그는 멈춘다. 황혼녘 하늘의 한 부분에 X자형 빈 구멍이 있고, 그의 손에는 V자형 조각이 끼어 있다. 퍼즐 제작자 윙클레가 마지막에 심어놓은 속임수다. X자형 구멍에 V자형 조각은 맞지 않는다. 바틀부스는 그 채워지지 않는 틈을 손에 쥔 채 숨을 거둔ㄷ .
여기서도 페렉은 판단하지 않는다. 바틀부스의 삶이 허무했는지, 윙클레가 잔인했는지, 이 결말이 비극인지 희극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적을 뿐이다. X자 형태의 구멍이 있다. 손가락 사시에 끼어 있는 조각은 V자 형태다. 그것이 전부다.
마치며
<인생사용법>의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 충실하게 묻고 답하고 행동한 사람에 가깝다. 물론 그는 허무하게 죽었다. 그래서 판단하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인생사용법>을 읽고 바틀부스의 삶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그렇게 살아서 뭐가 남았냐고.
반대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끝가지 본 독자는 다를 것이다. <인생사용법> 보여주는 건, 삶이란 원래 맞지 않는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건물 안에 공종그네에서 내려오기를 거부하는 천재 곡예사, 가짜 성배를 산 부자, 사랑의 도피 끝에 농부가 된 화학 선생, 절도범이 된 대법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처럼. X자형 구멍에 V자형 조각. 그것이 실패인지, 속임수인지, 아니면 원래 삶이 그런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모호함 앞에 독자를 세워놓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생사용법>의 바틀부스만 보고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무가치하다고 단정지어선 안 된다. 생각해보면 바틀부스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향해 철저하게 나아갔기 때문에 주인공이었고, 나머지는 그냥 살았기 때문에 주변인이지 않았나. 물론 이 둘 사이에 어떤 위계도 없었지만.
- 다음글자동차 (自動車) 26.04.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