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읽고 (김형효, 인간사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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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함과 공허함의 차이
어떤 글을 읽다보면 문득 멈추게 된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문장은 분명히 존재하고, 개념도 제시되어 있으며, 권위를 갖춘 이름과 이론이 줄줄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읽은 후 남는 게 없다.
여기서 따라오는 찝찝함은 글의 난해함에서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뭔가를 말하는 척하면서 실제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상태랄까. 개념을 꺼내들었지만 그걸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상태, 논증이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던 상태. 이건 난해함이 아니다. 빈 공간에 그럴싸한 벽지를 바른 것이다.
이건 남 얘기가 아니다.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에서는 자크 라캉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가장 어렵고 까다로우면서도 빛나는 지점이다. 내가 자크 라캉 챕터를 읽고 이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정확히 위에서 언급한 류의 글이 나온다. 상징계, 대타자, 팔루스, 아버지 등등. 이 개념들은 각각의 경계가 정밀하게 구획되어야 제대로 작동하는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념의 경계를 제대로 구획하지 못하면 아버지라는 개념 하나로 전부를 말하려 든다. 마치 스위스 군용 칼 하나로 집을 짓겠다는 다짐과 비슷하다. 의지는 가상하지만 결과는 처참할 뿐이다. 다시 말해, 생각이 무르익지 않았는데 언어만 끓어넘치는 상황이다. 두 글자로 줄이면 무지. 세 글자로 늘리면 아는 척. 조금 있어보이게 말하면, 자신의 생각에 권위를 연출하기 바쁜 지적 나르시시즘. 지적 나르시시즘의 문제는 사유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드러낼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나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최진석 교수님은 나에게 개념을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같은 난해한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최진석 교수님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자 하는 기본학교 학생이라면 이 책을 이미 읽어봤을 것이다. 이 책은 교수님의 "여명의 철학자" 라는 글에서 짧게 소개된 바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개념을 정밀하게 구획해놓았고, 사유를 검증하는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난해함은 사유의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려다 보니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류의 글은 권위로 독자에게 무지성 신뢰를 구걸한다면, 이 책은 독자를 높은 시선으로 이끌어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독자 본인이 직접 산을 오르는 듯한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엘리베이터 같은 건 없다. 케이블카도 없다. 셔틀버스도 없다. 그냥 두 발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올라가다 지치면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는 수밖에 없다.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의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하여 원전을 섭렵하면서 1,299장의 원고지를 메우는 과정을 거쳤다고 고백한다. 1,299장. 나는 100원짜리 동전을 1,299개라도 모아본 적이 있었나?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카드만 쓰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책은 단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함으로 읽히지 않았다. 당시 한국 학계가 외국 이론을 피상적으로 수입하거나 장식용으로 소비하던 행태에 대한 무언의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직역을 피하고 뜻을 전달하기 위해 고심했다는 것, 개념을 기호화하여 정확히 사용하려 했다는 것. 이 대목들은 경계도 구획하지 않은 채 개념을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지적 나르시시즘에 대한 실천적 저항으로 읽힌다. 그냥 저항이 아니라 1,299장짜리 저항이다. 만약 1,300장으로 저항을 했다면 혁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물은 난해하다. 요약도 없고, 직관적인 예시도 없다. "자 여기서 핵심은 말이죠." 같은 친절함도 없다. 일단 개념이 등장하고, 그 개념이 다른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 그 관계가 또 다른 층위의 논의로 번지는 방식.
어떤 내용이냐, 구조주의가 뒤엎은 인간중심 사고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 구조주의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중심에 놓는 전통 철학과 거리가 있다. 의식, 자유의지, 주체성 같은 개념들은 여기선 설명의 출발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게 구조다. 언어와 문화, 신화, 제도, 무의식 같은 것들이 인간을 규정하는 근본 조건으로 제시된다. 인간이 구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이미 존재하는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효과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한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닐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마침 옆에 있던 호우섬 홍콩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잠깐. 이게 내 선택인가? 내가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어떤 구조가 나를 통해 밀크티를 마신 건가? 그렇다면 내가 밀크티를 좋아한다는 것도 내 취향이 아닐 수 있는 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 문장을 이렇게 끝낸 것도!?!?! ㄷㄷㄷ
구조주의를 접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일상의 아무 행동이나 붙잡고 흔들어보면 바닥이 꺼지는 느낌. 그러나 이상하게도 계속 읽게 된다. 바닥이 꺼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깨달음도 내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이는 자세랄까.
구조주의는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전개된 지적 운동이다, 이 책은 그 핵심 인물인 네 명.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 알튀세르를 독립적인 장에서 다루면서도 하나의 사유 체계 안으로 묶어냈다. 이 넷을 묶은 이유는 단순하다. 모두 의식의 주체성을 부정했으며, 인간 배후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적 구조를 사유의 중심에 놓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 식의 실존주의가 인간의 자쥬의지를 절대적 가치로 삼았다면, 구조주의는 그 자유의지가 작동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고 있는 어떤 메커니즘을 찾으려고 한다. 저자 스스로도 이 점에 오래전부터 기울어져 있었다고 고백한다. 인간이 생각만큼 자유롭지 못한 존재라는 생각인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최진석 교수님이 추구하는 방향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자아가 환각임을 배우는 걸 깨달음으로 보았다면, 최진석 교수님은 자아를 세우고, 그 자아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는 것이야 말로 성숙으로 말씀하신다. 한쪽은 자아를 해체한다면, 한쪽은 자아를 정립한다. 같은 인간을 놓고 한 명을 해체하라 하고, 한 명을 세우라 한다. 물론 이 대립이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누가 옳은지, 무엇이 부족한지 같은 냉철한 비판의식을 갖추고 이 책을 읽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난 그저 개념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구획하는 방법을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우고 싶었을 뿐이다. 달인의 손놀림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처럼. 직접할 수는 없지만, 보다 보면 뭔가 남는 게 있을 것 같다는 소박한 기대로.
누군가는 나에게 남는 게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모르겠거든.
저자가 대한민국에 던지는 메시지
저자는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 알튀세르만 순수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선진국이 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낙관에 불과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는 선진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이 단순 제도, 정치 체제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과학적 지식, 생활 속에 스며든 예술적 감수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외형적인 제도만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는 비판에 가깝다.
이 책은 한국사회가 여전히 개인의 의지, 감정, 경험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경향에 머물러 있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구조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개인의 선택이나 의식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 아래에 사회, 문화적 구조가 작동한다. 이러한 맥락으로 구조주의자라 할 수 있는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 알튀세르를 다루는 것이다. 고로, 현실을 이해하고 변화시키고 싶다면, 개인의 의지, 도덕적 판단이 아닌, 구조를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이념 대립이나 감정적인 판단으로는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이념과 의지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구조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라는 것. 서구를 따라가는 방식, 특정 이념에 몰입하는 방식은 모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각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구조를 이해하고, 그 위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와 우파 개념에 대한 언급도 날카롭다. 한번도 특수한 역학관계 속에서 한국에서 좌파가 서구에서는 중도 혹은 우파가 될 수 있고, 한국의 우파가 중국에서는 극좌파로 분류될 수 있다. 좌파와 우파의 규정은 의미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통사론적 관계 속에서, 다시 말해 어떤 세력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이 구조주의가 정치 분석에 던지는 핵심 통찰이다.
이 책의 매력은?
난 서두에서 최진석 교수님의 말을 인용했다. 개념을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 채의 매력은 거기에 있따. 개념의 경계를 제대로 지켰다는 것.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연결되는지. 에피스테메와 담론과 언표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다원결정과 단순결정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지었다. 네 명의 사상가가 각자의 개념을 얼마나 엄밀하게 구성하고 사용했는지를, 저자도 같은 태도로 보여준다. 개념을 설명하는 사람이 개념을 흉해내는 것과 개념을 실제로 쓸 줄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깝다.
이 책을 읽다보면 특정 개념을 장식적으로 사용하는 글들이 얼마나 빈껍데기인지 보이게 된다. 안성제 셰프가 음식에 의미 없이 꽃을 올려놓는 걸 싫어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지? 꽃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꽃이 왜 거기 있는지 모르는 채로 올려놓는 게 문제인 것이다. 개념도 마찬가지다. 개념의 경계를 아는 것이 곧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매우 어렵다. 나도 똑바로 못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개념의 경계를 제대로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다. 어쩌면 이 글 어딘가에도 꽃이 의미 없이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발전한 게 있다면 그게 부끄럽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발전의 시작이라고 누가 말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사실 이 말도 장식용으로 인용한 것이다.
아무튼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건 크게 두 가지다.
1. 세계를 달리 보는 경험
2. 내가 얼마나 더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난해하고 어려워도 읽을 가치가 있는 이유
이 책이 쉽다고 말하는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서문에서 난해함을 여러 번 토로한다. 구조주의의 공부를 포기할까 하는 심정을 여러 차례 가졌다고. 좌절과 절망을 맛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쓴 이유는 자신이 겪은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해하기 쉽되, 학문적 품위를 잃지 않는 방식으로 전달하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 다짐이 얼마나 성공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절반은 성공한 것 같다. 저자는 쉬운 설명을 위해 노력했다. 개념이 나올 때마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었고, 다른 사상가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위치를 잡았고, 장이 끝날 때마다 정리까지 해줬다. 프랑스어 원문을 병기하는 방식 또한 독자가 개념의 원래 뉘앙스를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용 자체가 워낙 복잡하면서, 다루는 사상들도 저마다 독자적인 개념을 구축하고 있다. 만약 독자가 언어학 기초도 없고, 프로이트를 읽지 않은 상태라면 중반부터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건 저자의 실패가 아니다. 구조주의가 원래 그런 사상이기 때문이다. 레비 스트로스를 제대로 읽으려면 언어학과 인류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갖춰져야 한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모르면 안되는 것이고, 푸코는 서양 지식사에 대한 구조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기본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이 책에 등장하는 네 명은 각자가 이미 독립적으로 방대한 사상 체계를 이룬다. 그것을 한 권에 담으면서 어느 수준 이상의 밀도를 유지하려면 독자에게 일정한 지적 노력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읽다가 막히는 지점에서 자신의 무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과, 이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막혔다는 인식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포기로 이어진다면, 후자는 다른 책으로 연결된다. 소쉬르,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를 읽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 책은 어렵다. 그래서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읽다가 멈추고 생각하고, 금붕어 마냥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고, 다시 나아가는 방식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빠르게 지나치는 독서법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래는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이 다룬 내용을 언어학, 레비 스트로스, 라캉, 푸코, 알튀세르에 대한 생각을 짧게 요약한 내용이다.
언어학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은 언어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그래서 개념 자체가 언어학 용어로 가득하다. 기표와 기의, 랑그와 파롤, 공시태와 통시태, 은유와 환유, 이항대립 등등 이걸 모르면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 분석,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푸코의 에피스테메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2장 전체를 언어학 설명에 쏟아붓는다. 현명한 결정이다. 마치 스키를 가르치기 전에 눈이 차갑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주는 것 같다랄까.
소쉬르 구조언어학의 핵심은 언어 기호가 그것을 가리키는 사물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무'라는 기표가 개념을 가리키는 건 자의적 약속의 결과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이 어느 날 집단적으로 나무를 '초록기둥'이라 부르기로 합의했어도 언어는 똑같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긍정적 실체의 집합이 아닌, 차이들의 체계다. 기호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밝다'는 '어둡다'와의 차이 속에서만 밝음이 되는 것처럼. 만약 어둠이 없다면 밝음도 없다.
레비 스트로스
이 기초 위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학에 구조적 방법을 도입한다. 핵심은 야생적 사유라는 개념이다. 미개 사회의 신화나 토테미즘이 서양 과학보다 열등한 게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구조화하는 논리라고 본다. 야생적 사유는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들을 재료로 삼아 세계의 질서를 직조한 브리콜라주다. 신화는 이항대립의 논리로 자연과 문화 사이의 모순을 매개로 하여 해소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레비 스트로스가 수 많은 신화를 분석해서 발견한 것은 겉으로는 제각각처럼 보이는 신화들이 실제로는 몇 가지의 기본 구조의 변주라는 점이다. 수백 개의 신화를 모두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나는 그리스 신화 등장인물 이름을 절반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와 헤르메스를 아직도 헷갈리는 중이다.
라캉
라캉 챕터는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빛나는 부분이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언어학으로 다시 읽는데, 그 태제는 다음과 같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것. 이는 무의식이 단순 생물학적 본능 덩어리가 아닌, 상징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무엇임을 의미한다. 라캉에게 인간 주체의 탄생이란 상징계. 다시 말해, 언어와 법의 질서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진입은 동시에 상실이다. 어머니와의 상상적 합일에서 분리되어 언어의 세계로 내던져지는 것. 이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결핍된 존재다. 욕망은 이 결핍에서 발원하고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욕망이 향하는 대상은 본질적으로 도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항상 욕망 자체를 욕망한다. 이 구조가 인간의 번뇌를 필연적으로 만든다.
푸코
푸코 챕터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다룬다. 푸코는 역사를 진보의 서사로 읽지 않는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를 규정하는 무의식적 인식 틀, 에피스테메가 있고 역사는 이 에피스테메의 단절과 교체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역사가 A에서 B, B에서 C로 발전해왔다고 믿는다. 푸코는 그 믿음 자체가 어떤 시대의 에피스테메, 다시 말해 그 시대 특유의 무의식적 인식 틀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 고전 시대, 근대는 연속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각각의 불연속적 인식론적 공간을 형성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읽어나간 매끄러운 인류 진보의 이야기를 푸코 앞에서 하면 민망해질 것이다. 나아가 지식은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은 근대의 발명품이며, 근대를 지탱하는 인식론적 토대가 흔들리면 인간도 해변의 모래 위에 그린 얼굴처럼 지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알튀세르
알튀세르 챕터는 책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한다. 마르크스를 인간 소외의 극복을 꿈꾼 인간주의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로 읽는다. 다시 말해, 젊은 마르크스와 성숙해진 마르크스는 사실상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수염도 같지만. 사회구조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여러 심급이 비동증적으로 얽힌 복합 구조이자, 기계론적 인과율이 아니라 다원결정이라는 개념으로만 파악된다. 혁명은 의식하된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라, 구조의 모순이 스스로 파열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알튀세르 본인은 훗날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재판도 받지 않는다. 구조의 모순이 스스로 파열하는 순간을 혁명이라고 한 사람이, 가장 파국적인 방식으로 파열한 건, 이론의 아이러니인지 인간의 비극인지 헷갈린다. 이 답은 누가 낼 수 있을까? 다원결정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조차 자신의 다원결정을 설명하지 못했으니까.
마치며
이 넷은 무엇으로 묶여져 있나? 저자는 무의식의 구조로 보았다. 이들 모두 인간의 의식이 진리를 만드는 주체라는 믿음을 거부한다. 의식 하애, 의식 이전에 작동하는 어떤 구조가 있고, 그 구조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에게는 신화적 사유의 무의식적 구조가, 라캉에게는 욕망의 언어적 구조가, 푸코에게는 에피스테메가, 알튀세르에게는 다원결정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생각한다고 믿는 그 생각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게 아닐 수 있다. 내가 욕망한다고 믿는 그 욕망도 구조가 나를 통해 욕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역사를 만든다고 믿는 확신은 사실 에피스테메가 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이 대목을 읽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쩌면 의자에 등을 기댄 것도,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내 결심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에서 다루는 이 네 명이 공유하고 있는 건 하나다. 인간이 스스로 규정한다는 건 오만에 대한 거부라고. 뭔가를 이해했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 그 이해가 다시 나에게 돌아와 발목을 잡는다. 어쩌면 이것도 구조의 산물이려나??
아!! 알튀세르가 왜 정신이상 판정을 받고, 아내를 죽였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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