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사 2편을 읽고 (앨런 라이언, 남경태 이광일 옮김, 문학동네 2017)
페이지 정보

본문
굳이 <정치사상사> 1권, 2권을 나눠 쓸 필요가 있을까 했다. 책은 1권, 2권으로 구분 지었지만 결국 한 권으로 이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권까지 모두 읽은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납득해줄 것이다. 1권과 2권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1권은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긴 답변으로 읽혔다. 그리고 2권은 그 답이 더 정교해진다. 2권에 내놓은 답변은 "좋은 정치는 갈등을 관리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인데, 그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습속과 문화, 신뢰, 합의가 우선이다." 로 읽혔다.
2권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은 더 나은 정치 질서를 설계하려 했다. 홉스는 계약을 통해 국가를 세웠다면, 로크는 혁명권으로 이를 교정했고, 루소는 일반의지로 정당성을 찾으려 했고, 매디슨은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는 정교한 헌법을 설계했고, 마르크스는 그 구조를 모두 뒤집으려 했고,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엘리트 경쟁 시스템으로 재정의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모든 시도들의 한계를 냉철하게 짚었다. 홉스는 계약으로 국가를 세웠지만 결국 복종의 신학이 되었다. 로크는 혁명권을 보장했지만 그 혁명이 무엇을 건설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 루소는 일반의지를 말했지만 그것을 채울 내용은 빈칸이었다. 매디슨은 파벌을 제도로 견제하는 시스템을 설계했지만 노예제 앞에서 그 제도는 멈추고 전쟁이 대신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해부했지만 혁명 이후의 사회를 설계하지 않았다. 복지국가는 계급전쟁 위험을 완화해주었지만 불평등의 구조를 없애지 못했따. 슘페터의 엘리트 경쟁 민주주의는 현실을 잘 묘사했지만 그 경쟁이 왜 지속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2권에서 볼 수 있는 답은 습속, 신뢰, 합의, 시민적 문화다. 이건 제도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작동하기 위해 미리 갖추어져야 할 것들이다. 법으로 명령할 수도 없으며, 설계도도 그릴 수 없다.
1권의 답안이 "갈등을 담아낼 그릇인 제도가 중요하다." 에 가까웠다면, 2권의 답안은 "그릇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건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읽혔다.
저자는 교육자답게 결론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챔터에서도 그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공정하게 펼쳐놓을 뿐이다. 존 듀이의 낙관적인 시선, 리프먼의 냉소, 슘페터의 현실주의, 밀스의 울분, 누가 맞는지 판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목소리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만들어준다.
말이 나온 김에 질문을 굳이 던져보자면, 다음과 같다.
제도보다 습속과 신뢰가 중요하다면, 습속이 없는 사회는 좋은 제도를 가질 수 없나?
나치즘도 마르크스주의도 전체주의로 귀결됐다. 이성이 전체주의를 막을 수 없다면 무엇이 막을 수 있나?
좋은 제도보다 좋은 시민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그리고 그건 누가 결정하나?
어쩌면 이게 정치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다듬어주는 것.
이 책의 매력은 단순 정보에 있지 않다. 홉스가 무엇을 주장했고,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이론이 무엇인지는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주는 가치는 엄밀한 생각을 하기 위한 가이드에 가깝다. 각 사상가들을 단독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서로의 맥락 안의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박이라면, 로크는 홉스에 대한 수정본이고, 루소는 로크에 대한 불만 제기이며, 마르크스는 루소를 경제학 언어로 번역한 것이고, 슘페터는 존 듀이에 대한 반박이다. <정치사상사>는 이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각자가 놓친 것들을 짚어준다.
이 책은 A-Level 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논증이 아닌 확장식 서술 방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서술의 내용이 각 사상가의 논증을 해부하는 작업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논증을 분석하는 훈련을 간접적으로 받는 기분이 들 정도다. 전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제가 결론을 어떻게 떠받치는지, 그 전제가 흔들릴 때 결론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추적하는 방법까지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이 책을 읽으며 간접적으로 받은 그 훈련을 공유하고자 짧게 줄인 내용이다.
홉스
저자는 홉스의 논리가 내부적으로 완벽하게 닫혀 있다고 지적한다. 절대권력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태어났지만, 절대 권력이 또 다른 공포의 원천이 되는 순간 홉스의 체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는 그 가능성을 닫아버리기 위하여 군주에 대한 복종을 도덕적 의무로 삼았다. 이성에서 출발한 이론이 복종의 신학으로 끝나버린 것으로 바라봤다.
다만 여기서 홉스가 2권 맨 앞쪽에 배치된 이유를 알 수 있다. 홉스는 정치사상사에서 최초로 도덕과 신학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다시 말해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거부하고 인간을 기계처럼 욕구와 공포로 움직이는 존재로 보았다. 이 출발점이 2권 전체를 관통한다. 물론 결론은 다 다르지만.
로크
로크는 홉스의 틀을 빌려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자연 상태는 전쟁이 아닌 평화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법 하에 나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로크의 자연법은 단순하다. 우리는 생존이 걸린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자유, 재산에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이 부분은 홉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로크는 우리의 삶이 그런 극단적 상황에 자주 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재산권은 신이 하사한 게 아니라 노동에서 나온다. 내 노동을 투입한 것이 내것이다. 정부는 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고, 보호에 실패하면 인민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따. 저자는 로크가 필머를 논박한 대목을 흥미롭게 다뤘다. 필머는 왕권이 아담에서 대대로 이어진 가부장권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이 대목을 조목조목 무너트린다. 저자가 보기에 이 논박은 단순한 논리 싸움이 아니었다. 로크는 정치권력의 원천이 혈통이나 신성한 위임이 아닌 동의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당대 사람들이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상대를 골라 논박한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또한 로크의 번역문에 가깝다. "생명, 자유, 행복추구." 로크의 "생명, 자유, 재산"에서 재산을 행복추구로 바꿨을 뿐이다.
매디슨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로크의 언어에 해링텅 제도 설계를 얹어 놓았다. 매디슨은 핵심 명제를 제시한다. 파벌을 없앨 수 없다. 파벌을 없애려면 자유를 없애야 하는데, 이는 치료가 병보다 더 나쁜 경우다. 그러므로 파벌이 서로 견제하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
그 답이 이중 주권 체제다. 연방과 주 당국이 시민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되, 어느 한쪽도 다른 쪽의 대리인이 되지 않는 구조. 홉스라면 혼란을 촉발하는 요인이라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매디슨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하나를 지적한다. 그 정교한 이중 주권 체제는 남북전쟁이라는 재앙을 막지 못했다. 제도는 그 제도를 지탱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있어야만 작동한다. 헌법에 명시된 타협이 노예제 문제를 직면하는 순간, 제도가 아니라 전쟁이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1권의 마키아밸리 통찰이 다시금 드러난다. 갈등을 담아낼 그릇인 제도가 없어졌을 때, 공화정이 망한다는 것.
루소
루소는 이 모든 논의에 근본적인 불만을 품었다. 홉스, 로크, 매디슨도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뿌리는 사유재산이다.
저자는 루소의 말을 인용한다. "최초의 인간이 주변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 땅은 내 땅이야' 라고 처음 말한자, 그리고 그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들을 발견한 자가 시민사회의 진정한 창시자다."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는 인민이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그 외에는 노예인 체제다. 진정한 자유는 일반의지에 복종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저자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에 대해 비판적이다. 일반의지는 아름다운 개념이다. 개인의 이익을 초월한 공동체의 진정한 이익이 있다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 누구도 일반의지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루소도 이에 대하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고 공백으로 남겼다. 그 공백은 대신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로, 스탈린이 수용소로 채웠다. 저자는 루소를 지지하거나, 루소에 기댄 사람들이 루소를 오독했다고 보지 않았다. 루소의 논리 안에 이미 위험이 잠재해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루소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루소가 발견한 게 진짜였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는 개인들의 자발적 계약이라는 허구 위에 서 있다. 그 허구 안에 불평등이 숨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루소의 통찰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루소의 통찰을 경제학 언어로 번역해서 풀어냈다. 국가는 유산자의 도구다. 이윤은 노동자의 무급 노동에서 나온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 가격에 팔지만, 그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는 노동력의 가격보다 항상 크다. 그 차이가 잉여가치이고, 그것이 자본가에게 돌아간다. 표면적으로는 공정해 보이는 거래가, 그 아래에서는 체계적인 착취가 일어나고 있따. 저자는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가져온다. "현실과 현상이 일치한다면 과학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착취이론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논리는 인정하지만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노동만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전제가 논쟁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기업가적 상상력과 조직, 위험, 감수는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둘째는 혁명 이후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구상은 빈약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소멸하고 노동자들이 관리하는 연합체가 생긴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 대해 마르크스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스탈린과 마오, 폴 포트가 대신 채워주었다. 저자는 이를 오독으로 보지 않았다. 그 공백이 원래 위험했다고 보았을 뿐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상당히 강력한 설명도구이지만, 저자는 이 도식의 결정론적 성격에 질문을 던진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 명료하게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생산력이 발전하면 그에 맞는 생산관계가 등장하고, 낡은 생산관계가 족쇄가 될 때 혁명이 일어난다.
20세기
스탈린주의, 나치즘, 파시즘. 저자는 이 세 체제가 전혀 다른 이념에서 출발했음에도 공통된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독점 권력을 가진 정당을 통한 대중 동원, 지도자 숭배, 중간 조직의 파괴, 개인의 사생활 말살, 법의 지배를 자의적 폭력으로 대체, 테러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
여기서 저자가 주목한 점은 역설이다. 나치즘은 반지성적이었지만, 이탈리아 파시즘은 나름의 정치사회학에 기대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과도할 정도로 지적이었따. 그런데 셋 다 모두 전체주의로 귀결됐다. 이성이 전체주의의 예방주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나치즘을 지지했고, 수많은 서구 지식인들은 스탈린주의에 매혹되었다.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취약성은 지성의 수준과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챕터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파시즘과 마르크스 주의를 동일시하는 냉전적 전체주의론에 대한 비판이다. 한나 아렌트의 분석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두 체제를 도덕적으로 통치시키려는 단순화에는 반대했다. 나치즘의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의 숙청 모두 끔찍해서 오줌 지릴 법 하지만, 그 이념적 뿌리와 논리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을 동일하게 뭉뚱그리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게으름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
제국주의 챕터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에 가깝다. 16세기 스페인의 비토리아는 스페인에게 아메리카 원주민 지배권을 줄 수 없다고 논박했다. 교황의 권위는 세속 지배권까지 뻗을 수 없다. 하지만 원주민이 자연법을 위반하거나 선교사의 접근을 거부한다면, 스페인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했따. 저자는 이 논리의 위험성을 짚었다. 자연법 위반의 판단자가 결국 스페인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보았다. 과잉 자본이 새로운 출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식민지화의 경제적 논리라는 것이다. 파농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다. 식민지화는 단순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인간성 말살이다. 그에 저항하는 폭력은 피식민자의 자아를 회복하는 행위다. 저자는 파농의 분석을 예리하다고 평가하면서도 폭력이 자아를 회복시킨다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이 챕터를 관통하는 저자의 시선은 냉정하다. 제국주의르 정당화한 논리들은 모두 강자의 이익을 보편적 원리로 포장한 것이라는 것을.
사회주의들
사회주의 챕터는 이 책에서 가장 풍성하게 다가온다. 오언, 푸리에, 밸러미, 모리스, 페이비언협회, 복지국가. 이 계보는 하나의 공통 질문에서 시작한다. 자본주의는 번영을 창출했지만 그 번영이 왜 이렇게 불평등하게 분배되는가. 어떻게 하면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저자는 각각의 시도를 서술한다. 오언은 노동자 공동체를 직접 실험했고 실패했다. 푸리에는 팔랑스테르라는 공동생활체를 구상했다. 밸러미의 유토피아 소설은 19세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저자가 주목한 지점은 그 유토피아가 개인주의적이고 중산층적이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적 이상을 담으면서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편안한 중산층적 삶이었다. 모리시는 분개하며 목가적 전원 공동체로 응수했따. 페이비언들은 점진적 개혁을 택했고, 그것이 결국 복지국가로 이어졌따.
복지국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절제되어 있지만 분명하다. 복지국가는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공유하지도, 계급간 부를 근본적으로 재분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지국가는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유럽을 위협한 계급전쟁의 위험을 해결한 해법이었다. 비스마르크가 채찍과 함께 던진 당근이 결국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면역주사로 본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꿈 대부분은 자본주의 안에서 어느 정도 실현됐다. 노동시간 단축, 직업 선택의 자유, 창의적 노동의 가능성. 마르크스가 착취의 전형으로 묘사한 재봉사와 철도 신호원의 처우도 개선됐다. 물론 지구 반대편의 값싼 노동력으로 그 개선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갈등을 관리하는 방법이 정교해졌을 뿐이지 갈등의 구조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민주주의 챕터에서는 두 개의 극단이 충돌하는 장으로 상당히 흥미롭다. 존 듀이와 조지 슘페터다.
존 듀이에게 민주주의는 선거 제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과정이자, 그 과정이 인간을 더 완전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교육이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함께 판단하는 능력을 기를 때에야 민주주의가 작동한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처럼 철학자가 대신 생각해줄 수 없고, 루소처럼 타고난 본성이 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사고는 배워야 하는 기술인 것이다.
슘페터는 이 모든 것을 낭만주의라고 치부한다. 민주주의는 공동선을 달성하는 방법이 아닌, 공동선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하고, 설령 존재한다해도 일반 유권자들이 그것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민주주의의 실체는 엘리트가 인민의 표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비자가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가 소비자가 살만한 자동파를 먼저 만드는 것처럼. 정치도 이니셔티브는 위에서 나오고 유권자는 반응할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슘페터의 현실주의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보완해준다. 엘리트가 표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게임이 유지되려면, 게임의 규칙에 대한 합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적 제약, 소수 보호 조항,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이것들은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 미리 있어야 할 것들이다. 그것은 법으로 명령할 수 없으며, 사회와 역사가 쌓아온 습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 이전글체인 26.04.10
- 다음글정치사상사 1편을 읽고 (앨런 라이언, 남경태 이광일 옮김, 문학동네 2017) 26.04.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