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사 1편을 읽고 (앨런 라이언, 남경태 이광일 옮김, 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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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사>는 기본학교 책 읽기 모임에서 다뤄진 책이다. 이 책은 전형적인 벽돌책이다. 진입장벽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그래서 끝까지 읽으려면 독서 전략을 세워야 한다. 내 전략은 런던으로 유학가서, 한국의 수능이라 할 수 있는 A-Level 철학, 정치 시험을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옥스퍼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A-Level 시험을 준비하려면 이런 책이 아니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문을 읽어야겠지만.
그런데 왜 A-Levle이냐?
이 책의 서술 방식을 들여다 보면 A-Level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태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수능은 객관식이다. 어느 왕이 어느 제도를 만들었는지, 어느 사건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 외우고 있으면 된다. 틀리면 틀린 것이고 맞으면 맞는 것이다. 아주 깔끔하다. 하지만 영국의 A-Level 역사 문제는 대략 이렇다. "소머싯 공작은 국가 반란을 위기로 몰아넣은 무능한 지도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예 또는 아니오에 동그라미를 치는 게 아니라, 학생은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역사적 근거를 통하여 논증 형식의 에세이 글을 써야 한다. 고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연표를 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사건의 인과 구조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A-Level 철학도 비슷하다. "공리주의는 최고의 도덕 철학인가?" 라는 질문이 주어지면,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를 정확하게 설명한 다음,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곁들여서 반론을 구성하고 자신의 목소리까지 낼 줄 알아야 한다. 단순하게 "공리주의는 최고의 도덕 철학이다. 나 같은 외국인에게 가장 평등하고 공평하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만 써내려가면 채점관은 낮은 점수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코멘트를 남겨줄 것이다. 좋은 답안은 자신의 생각만 나열하는 게 아니고, 지식을 설명하고 끝내는 게 아닌, 정확한 지식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이다.
A-Level 수학도 비슷한 원칙으로 작동한다. 몇몇 문제는 미리 답을 알려주고 풀이 과정을 써내려가라고 한다. 심화 수학은 답을 몰라도 풀이 과정이라도 열심히 써야 한다. 그래야 부분 점수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A-Level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하나다. 정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나라와 잉글랜드의 교육 차이, 어떤 인간을 키워내고 싶은가의 차이일 것이다. Year 12, 한국 나이로 대략 16~17살 정도가 되면 런던의 학생들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교복이 아니라 비즈니스 웨어를 입기 시작한다. 법적으로는 미성년자이지만, 학교가 먼저 학생들에게 예비 성인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부터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기본학교 때 내가 쓴 에세이가 떠오른다. 교수님이 언급하신 지식인, 사상가와 각종 개념들을 제대로 끌고와서 에세이를 작성했다면 어땠을까. '쓰는 과정이 더 재미있었을 것이고, 결과물도 탄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때 나는 주로 내 생각만 잔뜩 썼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나에게 <정치사상사> 1편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긴 답안으로 읽혔다.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
내가 읽은 답은 다음과 같다.
"좋은 정치는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
이 답변은 나에게 익숙했다. 그 이유는 정치학자인 함재봉 교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고, 그 이유로 정치인의 말, 레토릭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좋은 정치는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란 주장을 뒷받참 하기 위하여 헤로도토스부터 마키아벨리까지 수 많은 사상가들을 차례로 불러 세워, 긴 답안지를 써내려간 것처럼 보였다.
플라톤은 철학자와 군주로 정치를 대체하려 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으로 세속 정치를 무력화하려 했다. 마르실리우스는 교황을 논박하며 세속 권력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도덕적 외피를 아예 벗겨냈다. 각자의 방식은 달랐지만 저자가 이 모든 시도에 내리는 평가는 일관적이다. 정치를 없애거나, 순화하거나 신성시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왜 실패했을까? 갈등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칼리폴리스에는 갈등이 없다. 철학자 그리고 군주의 지혜로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갈등이 없는 곳에는 정치도 없다. 갈등이 없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지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로마가 수백 년을 지속한 이유는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귀족과 평민은 끊임없이 충돌했고, 그 충돌을 혼합정체라는 제도 안에 담아냈다. 마키아벨리도 비슷한 말을 했다. 로마 평민들의 철수 운동, 귀족과의 끈질긴 갈등. 그것이 로마를 강하고 자유롭게 만들었다고.
갈등이 로마를 망하게 한 게 아니라, 갈등을 담아낼 그릇이 없어졌을 때 로마가 망했고, 그 그릇이 제도다.
결국, 내가 읽은 <정치사상사> 1권은 "좋은 정치는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라는 주장을 향해 달려가는 긴 답변처럼 읽혔다. 이렇게 읽은 이유는 내가 A-Level 시험을 준비한다는 콘셉트를 잡은 탓이겠지.
물론 누군가는 앨런 라이언의 "좋은 정치는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라는 주장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여전히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 같은 정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이건 플라톤도 그렇게 생각했다. 2,400년 전에.
읽고 나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다. 이 책은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이드이기도 하다.
내용뿐만 아니라, 구조를 들여다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저자는 플라톤을 설명하지 않고, 플라톤에 대해 논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소개하지 않고, 그의 주장이 어디에서 설득력을 얻고 어디서 무너졌는지를 바라보았다. 마키아벨리 또한 옹호하거니 바난하지도 않았다. 마이카벨리가 실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당시의 맥락 안에서 들여다 보고, 그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얹었다. 정확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에 기반한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낸 것. 어쩌면 이게 진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을 생각하는 법에 대한 안내서라고 한 이유는 엄밀한 논증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A-Level 모범 답안의 구조와는 살짝 거리가 있다.
혹시라도 오해할 사람들을 위해 말하자면, A-Level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플라톤을 비판하면서도, 플라톤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반론도 명시적으로 불러내어 논박할 줄 알아야 한다. 최진석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계에 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A-Level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려면 <정치사상사>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플라톤의 원문을 읽은 다음, 앨런 라이언의 의견까지 반박하거나 내 목소리를 얹을 줄 알아야 한다.
이 책의 매력은 방대한 지식도 있지만, 생각을 어떻게 밀고 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지식 위에 내 목소리를 어떻게 얹을 수 있는 지에 대한 감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부분에서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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