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전쟁을 읽고(아자 가트, 오숙은 이재만 옮김. 교유서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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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 가트의 문명과 전쟁
이 책은 기본학교의 책 읽기 모임, 네 번째 책이다.
물론 나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른다.
뭐 수준 높은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고 느낀점은 다음과 같다.
"전쟁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힘은 문명력이다.”
"이런 질문들은 새롭지 않으며 결정적인 답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이런 질문과 그 대답 모두 상투적 문구로 보일 정도다. 그러나 사실 이런 질문이 엄밀하고 포괄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적은 드물었으며,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거창한 질문이라고 여겨져왔다."
12p.
위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문명과 전쟁>은 지적 호전성이 강하게 발휘된 책이라 생각한다. 전쟁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인류사 전체를 가로 지르고 있으나, 이를 학문으로 다루기에 상당히 방대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회피했었다. 그러나 <문명과 전쟁>은 과감하게 도전했다. 고고학, 인류학, 진화생물학, 경제, 정치, 철학 등 다양한 지식들을 아우르며 난제를 다뤘다.
내가 느낀 이 책의 결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전쟁은 인류 문명의 그늘이 아닌, 문명을 탄생시킨 조건이었다. 인류는 전쟁을 통하여 공동체를 조직했으며, 기술을 발전시켰고, 생존을 위한 협력 정신을 구축하였다. 이로 인해 인간은 파괴적인 존재가 되었다.
둘째, 문명은 폭력을 억누르면서도 폭력을 제도화했다. 국가와 법 그리고 군대는 개인의 폭력을 줄였으나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을 정당화했다. 그러므로 평화란 전쟁의 부재가 아닌, 폭력을 관리하는 상태에 불과하다.
셋째, 전쟁의 비밀은 인간 본성 속 양면성에 있다. 인간은 보호하기 위하여 싸우고, 사랑하기 위해 지배하며, 생존을 위해 죽인다. 다시 말해 문명이란 이 모순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실험이다.
고로, 이 책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은 단순 군사력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국사, 경제, 문화 등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은 "전쟁을 해야 하냐?" 가 아니다. "전쟁을 어떻게 억제하고 관리하느냐"에 가깝다. 그리고 그 해답은 문명력이라 생각한다. <문명과 전쟁>을 읽고 생각한 문명력은 크게 네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1) 법과 제도로 내부 폭력을 관리하고, (2) 군사력과 동맹으로 외부 침입을 억제하고, (3) 경제 안정을 통하여 전쟁 동기를 약화시키고, (4) 문화와 교육을 바탕으로 국민 개개인의 폭력성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위 모든 것들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힘이 문명력이며, <문명과 전쟁>을 통해 바라본 문명력의 네 가지 축은 다음과 같다.
(1)
"홉스에게 인간의 '자연 상태'는 고질적인 '투쟁(ware)'의 하나로서 이익과 안전, 명성을 위한 살인적 다툼이자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이며 삶을 '가난하고 힘들고 잔인하고 단명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서 구제되고 고양되는 길은 강제적 권력을 동원해 적어도 내부 평화를 강요하는 국가를 창조하는 것뿐이었다."
22p.
(2)
"산업화 이전 시기와 비교해 극적으로 빨라졌다. 역사적으로 산업화 이전 문명(그리고 스텝지대)에서 군사 장비는 수천 년에 걸쳐 느리게 개량되었으므로 철기시대의 육군들은 서로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화약 도입 이전인 근대 전야에는 적수에 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략) 산업-기술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까닭에, 한 세대에서 최고의 무력이라 해도 다음 세대의 중무장한 무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
684 p.
(3)
유럽의 모든 정부가 대의제를 바탕으로 수립될 때, 국가들은 서로 친숙해질 것이고 궁정의 음모와 계략이 조장하는 악의와 편견은 멈출 것이다. 더욱이 국내와 국외에서의 약탈을 기반으로 하는 군주국들은 상업에 간섭한다. 상업은 평화로운 체제로서, 제도들은 물론이고 국가들까지 서로 이롭게 만듦으로써 인류의 화목을 증진한다. 전 세계적 규모로 작용할 수 있다면. 상업은 전쟁 체제를 근절할 것이다.
660~661p.
(4)
"폭력적 행동은 선천적 잠재성이지만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기도 하므로, 호전성이나 평화주의는 경험을 통해 습관화될 수 있다."
200p.
난 <코스모스>를 읽고 “산업화, 민주화 세대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직시하자.” 라고 했다. 앞서 말한 문명력은 산업화, 민주화의 성취를 이어가고,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력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의 성과를 그대로 계승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인류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기틀이기 때문이다. 내가 문명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다.
이 책, 어떠냐?
이 책은 지적 호전성이 강하게 발휘된 책으로 다가왔다. 난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 역사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역사 서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반부는 과학자처럼 각종 데이터들을 모았고, 중반부는 사회학자처럼 추론과 분석을 했으며, 후반부는 철학자처럼 문명을 들여다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 사회학, 철학을 동시에 다루는 책으로 다가왔다.
<문명과 전쟁>의 서두는 아래의 질문을 통해 사유의 방향을 제시했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문명에 의한 것인가?"
루소의 인간관과 홉스의 인간관을 병치시켜, 인간이라는 존재를 근본적으로 탐구하며 전쟁에 대해 접근할 것인지 밝혔다.
책의 초반부는 과학책을 연상케 한다. '사례(관찰) -> 분석 -> 부분 결론' 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과학적 사고에 가깝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쟁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하여 인류학, 고고학, 진화생물학으로 접근한다. 침팬지 집단의 영역 전쟁과 구석기 인류의 유골 손상 흔적, 수렵채집인의 폭력 사례를 바탕으로 "전쟁은 문명 이후의 폭력이 아닌, 인간 진화의 연속선상에 있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책의 중반부에 도달하면 사회학 책을 연상케 한다. 여기는 실증적인 데이터가 아닌, 역사적 사례를 시작으로 구조를 분석하고 논리적 일반화를 하기 때문이다. <문명과 전쟁>은 폭력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 폭력이 어떻게 제도와 질서로 흡수되었는지 접근한다. 여기서 그는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통하여 국가의 역할을 정의내린다. 국가는 폭력을 제거한 게 아닌, 폭력을 독점하여 문명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명은 폭력을 억누르는 게 아닌, 폭력을 새롭게 구조화한 것으로 바라본다. 전쟁은 단순한 파괴의 연속이 아닌, 문명의 조직 원리로 작동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역사적 사례 -> 논리적 일반화' 라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 철학책 읽는 느낌이 든다. 그는 "전쟁은 문명을 파괴했나, 문명을 만들었나?", "평화는 폭력의 부재인가, 폭력을 제도화한 것인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마치 기본학교 2차 에세이 시험 문제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핵무기 억지부터 민주주의 평화론 등이 품고 있는 허상을 꼬집으며, 문명은 폭력을 제거한 게 아닌, 의미화한 체계로 폭력을 가둔 것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후반부는 설명에서 사유, 과학에서 윤리, 현실에서 인식으로 옮겨가도록 했다. 이는 명확한 답을 내놓는 게 아닌, 독자가 다시 질문하여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문명과 전쟁>의 전체 서술 방식은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실증적인 데이터를 보여준 것을 시작으로 이론적 추론, 철학적 성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땅에 발을 딛고 있다가 우주로 상승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 세 단계는 각기 다른 학문의 언어와 논리로 접근했음에도 일관된 리듬을 유지한 것처럼 다가왔다.
내가 느낀 이 책의 매력은 결론보다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나면, "문명은 ㅇㅇ이다.", 전쟁은 ㅇㅇ이다." 같은 생각보다, 전쟁과 문명을 사유한 과정 속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로 이어지게 된다. "전쟁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힘은 문명력이다." 와 같이 느낀 이유다.
평화란, 관리되고 있는 폭력이다?
"국가는 단일한 권력 핵이 대개 폭력적인 사회 내 경쟁에서 다른 세력들을 전부 물리쳤을 때, 또는 권력 핵들이 자기들 사이의 경쟁을 규제하기 위해 한데 뭉쳤을 때 출현했다. (중략) 권력을 제도화하고, 다른 사회권력 핵들을 복종시키고, 나아가 전례 없는 수준의 위계적 조직화와 강압, 체계적 자원 징수, 병력 동원을 도입하는 한편 인접한 국가 구조들과 경쟁했다.”
526p
<문명과 전쟁>의 저자인 아자 가트가 강조한 리바이어던의 개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가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을 억누르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적인 장치다. 홉스가 말했듯,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상태를 끝내려면 폭력을 독점할 수 있는 권력인 국가가 필요했다.
대한민국도 이 논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그 평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는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는 도덕 지향적인 언어를 뱉으며 평화를 외친다. 그러나 아자 가트가 말하고 있는 평화란 힘을 통한 질서에 가깝다. 다시 말해, 평화는 협상 테이블에서 악수와 싸인을 통해 형성되는 게 아니라, 체계적인 억제력을 통해 세워놓은 구조물인 것이다. 억제력이 없는 평화는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출신인 저자는 전쟁을 겪은 자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전쟁의 공포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수록, 가장 단단한 억제 체계를 갖출 줄 안다. 이 책의 그렇게 <문명과 전쟁>의 사유를 서당개마냥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협상을 통해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은 전쟁의 공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에 가깝다는 결론에 가까워진다.
<문명과 전쟁>이 말하는 리바이어던은 단순 토마스 홉스의 정치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아니었다. 문명이라는 체계가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폭력을 어떻게 제도화하였고 통제했는지를 인류학적으로 접근했다. 국가라는 제도가 문명의 핵심이면서 폭력의 합법적 독점 장치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가란 다른 국가에 맞서 국민과 자원을 동원하는 기본적이며 아마도 응집력 있는 전쟁 단위라는 인식이 그동안 너무 만연했다. (중략) 강한 국가일수록 사회를 규제하고 홉스가 말한 전반적인 무정부 상태의 불안정성,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내부의 평화로 대체하는 데 더욱 성공을 거두었다. (중략) 막스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국가는 정당한 물리력을 독점할 권리를 성공적으로 보유한다"
528p
여기서 국가가 폭력을 완전히 거세하는 존재가 아닌 폭력을 관리하면서 소유한 존재라는 걸 볼 수 있다. 사람을 서로 죽일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한 명의 절대적인 권력자에게 위임한 것이다. <문명과 전쟁>은 이에 주석을 달았다. "국가는 내부 폭력을 줄였으나, 외부의 전쟁을 제도화했다."? 리바이어던이 창조한 평화는 일정 경계 내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리바이어던 치하에서 폭력적 죽음의 비율이 낮아진다는 것 -홉스가 처음으로 지적했다- 은 싸움의 책임을 국가에 돌리는 견해와 상충한다. 국가는 내부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약속하는 대신 무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 자원을 강제로 징발한다는 의미에서 적절하게도 조직범죄에 비유되어왔다. (중략) 조직범죄로서의 국가 치하에서 폭력이 더 큰 규모로 자행되고 더 극적이긴 했지만, 사실 사상자는 더 적게 야기했다. 국가의 체계적인 ‘강탈’은 ‘홉스적 전쟁’보다는 경제에 지장을 덜 주었다. 또한 국가는 보호를 더 많이 제공했다.”
535p
국가는 폭력을 줄이기 위해 태어났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국가가 효율적인 폭력 수행 주체가 되었다. 다시 말해,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적 체계 속으로 흡수되어 합리화된 것일 뿐이다.
<문명과 전쟁>의 논지를 대한민국으로 옮기면 평화는 힘이 있어야 유지된다는 걸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힘은 문명력이다. 한반도에는 현재 두 개의 리바이어던이 공존하고 있다. 남쪽은 법치와 제도를 통하여 무력을 통제하는 민주적인 리바이어던이라면, 북쪽은 전체주의적 리바이어던이다. 두 체제는 서로를 타자화하면서 공존하고 있으나, 그 자체로 상호 억제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 불안정한 평화를 그 누구도 이상적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홉스의 관점으로 들여다 보면, 조금 다르다. 이는 오히려 안정적인 무정부 상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명과 전쟁>이 말하는 강력한 국가는 단순 군사력이 강한 국가로만 한정지을 수 없다. 폭력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부 질서가 견고하지 않은 나라는 외부의 폭력에도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 마치 로마 제국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이 품어야 할 가치는 단순 전쟁 회피라는 평화 앵무새 같은 태도가 아니다. 문명력을 키워 폭력을 통제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강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 책이 말하는 문명이란, 폭력이 부재한 상태가 아니라 폭력의 관리체계에 가깝다. 인간은 항상 폭력성을 품은 상태로 문명을 세웠다. 이를 제어하기 위하여 법, 제도, 군사, 도덕, 종교 등을 만들었다. 문명이란 폭력의 관리 기술이다.
고로, 진정한 평화는 전쟁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전쟁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문명력을 갖춘 나라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다수의 핵탄두를 보유한 북한만 보더라도 평화는 군사력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니다. 2023년 7월, 북한 열병식에서 시위진압부대가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2025년 10월 열병식에 ‘사회안전특수기동대’라는 정식 명칭으로 다시 등장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외부의 억제력을 갖출 수 있으나, 내부 폭력까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이것이 <문명과 전쟁>을 통해 알 수 있는 문명의 작동 원리이며, 우리가 품어야 할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
문명이 진보할수록 평화와 멀어진다?
<문명과 전쟁>은 기술이 문명을 진보시켰다는 통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인류는 기술을 통하여 생존 범위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파괴의 효율성도 높였다. 농업의 발명은 인류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했다면, 그 잉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총기, 증기기관, 원자력 나아가 인공지능까지. 인류의 기술은 항상 전쟁 속에서 진화했다.
"산업-기술 혁명이 시작된 이래 하드웨어의 양뿐 아니라 효과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했다. (중략) 군사 기술이 혁신되는 속도는 산업화 이전 시기와 비교해 극적으로 빨라졌다. (중략) 산업-기술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까닭에, 한 세대에서 최고의 무력이라 해도 다음 세대의 중무장한 무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
683~684p
저자는 전쟁을 통하여 인류의 무기 발전 속도 자체만 국한하여 보지 않았다. 인류 문명의 기술 가속에 의하여 불안정성이 내면화된다고 보았다. 산업혁명 이전의 전쟁은 기술이 수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발전하며 일정한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로 인간의 기술은 그 자체로 불균형한 체계가 되어버렸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프로메테우스의 해방'이라 표현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한계에 묶이지 않고, 자신이 만든 도구를 통하여 이전 세대의 문명을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기술은 평화를 위한 억제력으로 작용하지 않고, 새로운 불안전성의 뿌리가 되었다. 총과 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신의 의지에서 기술의 결과로 바뀌었고. 전차에서 드론, 인공지능 등의 무기가 등장한 오늘날에는 전쟁의 책임이 개인 또는 군주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문명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산물이 된 것이다. 기술이 문명 발전을 이끌었으나, 그 발전이 전쟁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여기서 아자 가트는 기술발전으로 인한 '전력 승수 요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술 시대의 군비 경쟁은 완전히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했다. 특히 한쪽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무기 체계를 획득하고 흡수해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는 데 성공할 경우, 전장에서 일방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전력 승수 요인(force multiplier)’을 얻을 수도 있었다. (중략) 그러나 경쟁국들이 새로운 무기 체계를 개발하고 흡수해 격차를 줄여감에 따라 불균형이 상쇄되는 ‘붉은 여왕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689p
이 말은 기술이 단순 전쟁 수단이 아닌, 전쟁의 결과 자체를 좌우하는 변수라는 것이다. 전투의 승패가 이제는 군인들의 용맹성, 전략의 정교함이 아니라, 누가 더 빠르게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응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세기 프로이센의 후장식 라이플에서 20세기 전차, 21세기의 드론과 사이버 무기 등. 모든 전쟁은 기술력의 차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격차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붉은 여왕 효과'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 경쟁자들이 서로를 따라잡기 위해 끊임없이 달릴 수밖에 없는 끝없는 군비 경쟁의 함정인 것이다.
<문명과 전쟁>은 기술의 본질적인 속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은 결코 산업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1837년 이래 전신의 발달, 19세기 후반 이래 전기와 화학물질의 발달, 한 세기 뒤에 전자공학이 주도한 변혁이 그 증거다. 프로메테우스처럼 비동물 에너지원을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이용함으로써 오래된 속박에서 벗어난 것은 기술 발전 일반의 속도, 혁신 자체의 속도였다. (중략) 문화적 진화 자체도 가속화되었으며, 사람들은 혁신에 훨씬 능숙해졌다.”
665p.
이는 기술의 발전이 전쟁 도구 발전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인간의 사고방식 또한 속도와 혁신에 길들여지면서, 문명의 진화는 곧 군사화의 가속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전신이 전쟁의 지휘 체계를 바꾸고, 화학은 파괴를 과학화하고, 전자공학은 전쟁을 가상화했다. 산업기술 문명은 인간을 더 편리하게 이끌어주었지만 동시에 더 치명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진화시켰다.
<문명과 전쟁>은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기술 발전과 전쟁 회피 경향에 대해 들여다 보며, 근대의 모순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산업기술 시대의 유례없는 발전, 특히 자유주의 발전 노선에 뿌리박은 상술한 이유들로 인해 풍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유례없이 전쟁을 혐오하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이와 비슷하게 근대의 조건 또한 혁명적이다.”
786p.
표먼적으로 놓고 보면, 기술과 민주주의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평화는 기술적 억제력에 의한 힘의 평화에 가깝다. 다시 말해, 전쟁이 줄어든 게 아니라, 전쟁의 형태가 보이지 않게 변한 것이다. 사이버 공감 침투를 시작으로 이루어지는 데이터 전쟁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문명과 전쟁>이 던지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기술은 인간 문명의 정점이면서도 가장 큰 위협이라는 것이다. 문명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폭력을 더 정밀하게 설게할 수 있고, 평화는 오히려 더 높고 우월한 기술적 억제력을 통하여 유지되는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높은 기술력과 산업화를 통하여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외부의 첨단 무기와 사이버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단순한 기술 경쟁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기술력을 문명의 통제 하에 둘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전쟁의 승자가 되기 위한 기술 강국이 아니라, 평화를 설계할 줄 아는 강력한 기술 국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동족 간 전쟁은 비극인가?
대한민국은 같은 언어, 같은 뿌리, 같은 문화를 나누며 살아오다 서로 총칼을 겨누는 건 비극으로 여긴다. 그런데 <문명과 전쟁>은 이를 단순 비극적 슬픔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문명과 인간 본성의 모순이 폭발하는 사건으로 바라본다. 이는 도입부에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전쟁은 어쩌면 불가피하게 인간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전쟁의 근본적인 뿌리는 과연 인간의 타고난 폭력성, 동족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 행동에 있는 것일까? 전쟁이라는 수수께끼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바로 이것인 듯하다."
19p.
이는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이 한반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은 외부의 침입으로만 일어나는 게 아닌, 인간 본성 속에 자리하고 있는 공격성, 경쟁심 그리고 권력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같은 피, 역사를 공유한 민족이어도 생존, 권력, 이익의 균형이 무너지면 전쟁의 본능이 깨어난다.
아래의 내용을 통하여 민족을 넘어 혈연 관계를 가진 집단에서의 폭력이 어떻게 문명 이전부터 인간 사회의 일부였는지를 알 수 있다.
"친족 관계는 대인 공격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사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포괄적응' 또는 '친족 선택'의 원칙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람들은 먼 친족보다는 가까운 친족의 편을 드는 경향이 있으며 친족이 위험에 처하면 그들의 촌수 및 수와 정비례해 기꺼이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고자 한다. (중략) 실제로 국지 집단은 말 그대로 형제들로 구성되었다. 사회학과 인류학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형제 이해 집단(fraternal interest groups)'이었다"
194p.
"부족사회에서 전쟁을 포함한 사회적 활동의 바탕에는 친족에 기반한 느슨한 사회 조직과 물질 자원이 증가하는 조건에서 내부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있었다. (중략) 외부 전쟁과 내부 평화를 가르는 우리의 국가 기반 구분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253p.
이처럼 인간은 가까운 집단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부에서의 경쟁과 폭력을 일으키는 모순적인 모습일 보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은 단순한 비극적 사건으로만 볼 수 없다. 인류 진화의 긴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온 것이다.
조건부 평화의 땅, 한반도는 어떻게?
"산업기술 시대의 유례없는 발전, 특히 자유주의 발전 노선에 뿌리박은 상술한 이유들로 인해 풍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유례없이 전쟁을 혐오하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이와 비슷하게 근대의 조건 또한 혁명적이다."
786p
위 내용에서 볼 수 있듯,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은 전쟁을 혐오한다. 그러나 이 이유를 단순 도덕적 반응으로만 볼 수 없다. 이 책의 저자가 바라본 전쟁을 혐오하게 된 배경은 제도의 안정성, 문명의 성숙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국가는 폭력을 억누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췄기 때문에 전쟁을 피한다는 것이다. 평화는 단순 선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 체계화된 억제력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경로를 부지런히 밟아온 국가라 볼 수 있다. 민주주의를 시작으로 언론의 자유, 법치주의와 같은 가치들은 폭력의 가능성을 사회적 합의로 전환시킨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평화를 단순 자연스러움으로 연결 짓기는 어렵다. 여전히 외부에는 군사적인 위협이 도사리고 있으며, 내부에서도 이념적 분열이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서 그려지고 있는 평화를 <문명과 전쟁>처럼 표현하자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조건부 평화에 가깝다.
북한은 리바이어던적인 국가 형태를 극단적으로 구현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문명과 전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는 내부 폭력을 줄이지만, 외부 전쟁을 제도화한다.", 다시 말해 북한은 이 구조를 가장 철저하게 수행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내부 통제, 외부 적대는 동일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억제된 전쟁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문명적인 긴장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긴장 상태는 아래의 구절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국가는 경제적, 행정적 하부구조 덕분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군복무는 직업군인들과 경계지역 주민들의 몫으로 넘어갔으며, 그러고 나면 이들이 권력을 잡을 수도 있었다."
576p.
"사람들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동족의 번영에 결정적이라고 인식해왔고, 외세에 종속된다는 것은 외국인의 수중으로 자원이 흘러나간다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문화의 통합성이 위협받는다는 것까지 함축했다."
562p.
위 두 구절을 종합하면, 문명적인 긴장 상태는 전쟁이 멈춘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문화와 이념, 이익 구조가 충돌하면서 내부적으로 경쟁, 불신이 쌓인 상태다. 다시 말해 총을 쏘지 않았음에도 전쟁의 원인이 계속 존재하는 불안정한 평화이자, 보이지 않는 대립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문명과 전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인한 문명력을 갖춘 국가는 이를 다스릴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의 폭력 본능을 억누르고, 경쟁심을 협동심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내가 생각하는 문명력이다.
한반도의 평화도 결국 이 문명력을 강력하게 키워서 유지시키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전쟁을 억누르고 관리하는 힘은 도덕, 선의, 교양, 윤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인류가 긴 시간 동안 걸쳐 만들어온 문명의 기술, 문명력에 있다.
"전쟁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힘은 문명력이다." 라고 느낀 이유다.
***
기본학교 책 읽기 모임은 <문명과 전쟁>을 두 달에 걸쳐 읽었다. 대략 60일, 대략 1,440시간 정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기본학교 칭구들이라면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자존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책 한 권을 두 달에 걸쳐 읽어야 한다는 건, 한라산을 2주에 걸쳐 오르자고 제안한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한라산 등반이 더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교수님이 바라보신 우리의 독서력이 이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 속도로 치면 나무늘보보다 약간 빠를 것 같다. 그런데 나무늘보는 나무에 메달린 상태로 잠을 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는 변명거리라도 있다. 그리고 나무늘보는 귀엽게 봐줄 수라도 있는데... 물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문명과 전쟁>은 두꺼운 책이므로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세밀하게 다룰 목적으로 두 달에 걸쳐 읽자고 하신 것일 수도 있다.
나 또한 이 글을 1부, 2부로 나눠 쓸까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반지의 제왕>도 굳이 3부작으로 나눴고, 톨 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4부작인데, 나도 1부와 2부로 나눠서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냥 귀찮아서 하나로 묶었다.
아래는 하나로 묶어야겠다고 다짐하기 전, 혼자 낄낄거리며 쓴 1부 초안이다. 냉장고에서 뒤늦게 발견된 차가운 치킨처럼, 버리기엔 아깝고 먹기엔 애매한 글이다. 그런데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기 아까우니, 여기다 버려야겠다.
***
(번외 1.) 경계에 흐르다.
<문명과 전쟁>은 경계에 머무를 줄 아는 사고를 보여줬다. 초반부에 토마스 홈스와 장 자크 루소를 소환하여 둘을 대립시킨다. 그런데 아자 가트는 둘 중 하나를 섣불리 택하지 않았다.
홉스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끊임없는 경쟁 같은 전쟁 속에 살았다고 보았고, 루소는 인간은 본래 평화로운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이 둘의 논쟁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알맹이 없는 관념 대립에 가깝다. 아자 가트는 이에 대해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접근한다.
홉스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폭력적인 존재라 하였고, 루소는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자 가트는 이 둘의 입장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경계에 머무르다 둘을 뛰어 넘는다. 그는 "폭력이란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지만, 폭력을 제도화하고 규율화한 것이 문명"이라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이란 본성과 제도의 중간지대에서 태어난 것으로 바라보았다.
<문명과 전쟁>은 인간의 폭력성과 협동심 또한 대립시키지 않고 동시에 품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제시한 생물학적 경쟁 원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단순 적자생존의 경쟁이 아닌, 사회적 협력 메키너즘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문명과 전쟁>이 바라보는 폭력과 협동은 대립되는 가치가 아닌 진화적 조건에서 함께 태어난 쌍둥이 같은 본성에 가깝다. 이어서 윌슨의 사회생물학,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가져와 전쟁을 본성의 일탈이 아닌, 적응의 산물로 바라보았다. 전쟁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공격성과 조직화 능력이 결합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문명과 전쟁>은 이분법적 사고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전쟁은 자연, 문화도 아닌 그 경계에서 형성된 것이고, 문명은 폭력을 제거한 게 아닌, 폭력을 제도화한 다음 재구성한 것. 그러므로 <문명과 전쟁>이 말하는 문명은 폭력의 반대말이 아니라, 폭력을 의미화한 다음 통제하는 능력이다.
<문명과 전쟁>의 사유는 단순한 과학적 설명, 철학적 사유에 그치지 않는다. 실증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사유의 경계를 넘나들며,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과학의 한계를 보완하였다. 그가 들여다 본 각각의 학문들은 분리된 영역이 아닌, 전쟁과 문명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언어였을 뿐이다. <문명과 전쟁>은 경계를 뛰어넘는 사고를 가장 잘 보여준 책이다. 다시 말해, 통합적 사고를 잘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문명과 전쟁>은 경계에 서 있다가, 루소의 철학을 비판한다. 이 지점에서 경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여길 수 있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는 최진석 교수님의 "경계에 서라." 란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경계에 서라." 라는 말은 경계에서 허수아비처럼 마냥 서서 중립기어 박고 있으라는 게 아니다. 쉽게 말하면, 이쪽도 저쪽도 쉽게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둘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불안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경계에 서서 이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변화하는 세계에 멈춰 서서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자 가트는 전쟁이라는 가치 판단의 경계에 서서 사례들을 긁어 모아 추론과 분석을 해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물들을 바탕으로 루소를 버리고 홉스를 택한 것이다. 이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놓고 보면, <문명과 전쟁>은 최진석 교수님이 말하는 "경계에 서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말고)
(번외 2)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문명과 전쟁>은 경계에 서 있다가, 루소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최진석 교수님의 저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소나무, 2014)>를 떠올리게 됐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저것"은 고정된 질서, 본질, 신분 등이라면, "이것"은 변화, 유연함, 관계, 다양성, 생명의 운동 등을 말하고 있다. 고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이 말하는 바는 본질을 향한 경직된 세계를 내려놓고, 관계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자." 정도로 볼 수 있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에 입각하여 바라본 철학은 이념의 건축물이 아닌, 생명의 순환. 인간은 질서의 부속물이 아닌 스스로 완결된 존재, 문명은 통일이 아닌 다양성 공존 위에서 진화하는 것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논리에 입각하여 루소와 홉스를 굳이 분류를 하자면, 루소는 저것이고 홉스는 이것이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또한 루소와 홉스에 대해 논할 때 <문명과 전쟁>과 비슷한 방향으로 루소를 비판했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ㅠ)
(이렇게 말하면 장 자크 루소가 모지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장 자크 루소는 결이 조금 다를 뿐이지, 처칠처럼 세상을 바꾼 사람이다.)
"인류의 싸움이 국가가 등장한 지난 5000년 동안이 아니라, 농업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1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는다. 그 시점이 되기까지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이 존재해온 이전 10만 년 동안, 그리고 우리 호모 속이 존재해온 200만 년 동안-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적 진화 상태에 있는 동안 인간은 평화롭게 살았을까?"
32p.
아자 가트는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전쟁이란 문명 이후의 산물이 아닌, 문명 이전부터 존재한 생존 양식이었는지 말이다. 이는 문제의 근본이면서도 다루기 불편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자 가트는 고고학, 진화심리학, 인류학 등의 지식들을 활용하여 "인간의 폭력은 타락이 아닌, 생존 경쟁의 부산물이자, 유전적으로 선택된 적응 전략이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팬지를 들여다 본다. 침팬지 수컷들은 영토 경계를 따라 무리를 지어 순찰하며, 단독으로 떨어진 다른 무리의 수컷들을 발견하면 협공하여 죽인다. 그 후 피살자의 영역 일부를 차지하면서 자원을 늘려나간다. 아자 가트는 이를 자연 상태의 전쟁 모델로 보았다.
<문명과 전쟁>이 바라보는 폭력성은 단순 진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선택된 적응이자 생존과 번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다시 말해, 전쟁이란 우발적인 충돌로 인한 파괴가 아닌, 인간이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발명된 기술이다. 충동적인 게 아닌, 생존을 위한 계산이다. 침팬지의 공격과 인간의 보복 그리고 부족 간의 약탈 모든 것들이 생존 전략이라는 틀 안에 있다.
이 지점에서 아자 가트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선택한다. 다시 말해, 아자 가트는 루소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루소에게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이란 고독하면서도 평화로운 존재다. 하지만 아자 가트가 나열한 근거들을 놓고 보면, 루소가 말하는 고독한 자연 상태의 인간은 존재한 적이 없다. 아자 가트의 관점으로 인간은 태초부터 사회적이고, 사회적 존재로서 경쟁적이었다. 여기서 사회성이 깊어질수록 폭력은 더욱 정교해진다.
고로, 인간은 관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만약 관계가 없다면 싸움도 없다. 그러나 누군가와 협동하기 시작하면,그 협동은 언제나 배제와 충돌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렇게 폭력은 인간 사회의 부정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다.
<문명과 전쟁>은 다소 냉소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적이 있었나? 폭력을 다루는 방식이 진화했을 뿐이다. 강자의 폭력은 제도로, 개인의 폭력은 법과 윤리로 대체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문명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고로, 평화는 결과가 아니다. 그저 과정이 만들어낸 하나의 균형일 뿐이다.
대한민국도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심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돈키호테처럼 저것만 바라보는 낭만이 아니라, 산초처럼 지금 이것을 바라보며 폭력을 통제하기 위한 지성과 제도를 세울 줄 알아야 한다.
문명은 폭력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고로, 그 꽃이 아름답게 유지되려면,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선 안 된다.
마치며, 문명력을 키운다는 것
딴 소리지만,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논리 그대로 적용하여 정부의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를 볼 수 있다. 지방에 서울대 10개를 세워 지방 균형 발전을 이루겠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에 4개의 과학기술원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과학고, 이공계 영재들은 네 곳 중 어디를 택하나? 대전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다. 광주과학기술원(G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은 오히려 포항공과대학교(POSTECH)에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서울대 10개 프로젝트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대 10개 프로젝트는 루소의 저것에 가깝다. 표면적으로는 균형과 평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서울대 간판이 붙은 지방 캠퍼스가 아닌, 서울 본교를 택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대가 양적으로 늘어나도 교육의 균형은 커녕 지방 균형 발전도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저것이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라면, 이것은 무엇일까. 아주 짧게 생각해보면 지방에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을 10개 키우는 것이다. 사실 대학은 산업과 결합할 때에야 건강한 지식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대학이 해당 지역의 기업과 협력하여 안정적인 생태계를 구축하여, 배운 지식을 그 지역에 바로 활용할 수 있다면, 청년들은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을 것이고 서울대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울대 10개보다 지방 대기업 10개를 키우려 노력하는 것이 교육, 지방이 함께 성장하는 균형발전의 출발점에 가깝다.
위 주장에 대해 대학이 기업의 연구 부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품을 수 있다. 대학은 순수 학문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과 산업과의 협력은 순수 학문이 현실과 호흡하며 지속가능한 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사례를 꼽자면 일본의 나고야 대학을 볼 수 있다. 나고야 대학은 글로벌 대기업 도요타와의 협력을 통하여 지역 연구 생태계를 발전시켰다. 나아가 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물론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 결과를 들여다 보면 대부분 기업의 요구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순수한 탐구 정신으로 출발한 것들이다. 다만, 그 결과가 산업으로 연결될 때에야 지식의 발견에서 문명의 발전으로 전환된다.
물론 일본 나고야 대학의 사례는 상당히 이상적이다. 그 이유는 지식의 발견에서 문명의 발전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초과학 성과가 산업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기업은 이 장기적인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기업들은 지금 당장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응용 기술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목소리는 이미 일본 내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다. 일본은 수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압도적인 기술력을 선보이는 기업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기초과학 성과는 화려하지만 시장 지배력은 미국, 독일, 중국에 비해 부족하다.
독일은 기초과학과 산업을 연결하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막스플랑크 연구소가 기초연구에 집중하고,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기초 연구 결과를 산업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기업은 이를 흡수하여 산업으로 녹여낸다. 기초연구 -> 응용기술 -> 산업화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덕분에 독일의 혁신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에서 시작되고 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자동차 산업, 뮌헨에서 기계 산업, 하이델베르크 화학 산업이 형성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아가 독일의 지방 대학은 기업의 하청 연구소가 아닌 독립된 학문 기관이자 산업과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에 가깝다.
나는 문명력이 위와 같은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한다. 촌스럽게 문명력을 비교하자면 한국 < 일본 < 독일 순이다. 한국은 산업과 학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추구하고 있다면, 일본의 학문은 출중하나 산업 간 영역이 탄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독일은 이 둘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 산업은 대학을 필요로 하고, 대학은 산업을 통하여 생존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독일은 일본에 비하여 노벨상 수상자 수가 적지만, 산업 기술력 그리고 글로벌 시장 경쟁력에서는 일본을 앞누르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의 경쟁력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문명력이 좌우하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님이 은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진석 교수님은 은유를 단순 수사학 장치로만 설명하시지 않았다. 서로 다른 차원의 사물 또는 개념을 연결하는 사고의 도구로 말씀해주셨다. 고로, 산업과 지식을 연결짓는 것 또한 은유적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지식과 기술, 철학과 공학이라는 이질적인 언어를 연결할 수 있을 때에야 새로운 문명의 언어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문명력이 강한 국가는 지식을 쌓고 생산하는 나라가 아닌, 지식과 산업을 연결할 줄 아는 나라다. 독일은 일본보다 은유를 잘했고, 일본은 한국보다 은유를 잘했다고 볼 수 있다.
너그럽게 생각해서, 서울대 10개를 늘린다고 해서 지식의 양이 늘어날 수 있다면 좋다. 하지만 이는 문명력을 키우는 데 큰 동력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반대로 지방에 대기업 10개를 키우는 일은 문명력을 키우는 일에 가깝다. 대학은 인재를 길러내고, 산업은 인재를 활용하여 세상을 움직인다. 서울대 간판을 지방 곳곳에 달아놓는다고 한들, 지역균형발전이 이루어질까. 지역균형발전은 지역의 산업, 기업, 기술 그리고 인재가 균형있게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산업 없는 대학은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실속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산업이 지식을 원만하게 흡수할 수 있을 때에야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살아있는 문명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
문명력은 지식의 양 하나로 강해지는 게 아니다. 지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산업의 힘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지식이 한 곳에 오랫동안 고여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식을 현실 세계에 작동시킬 줄 아는 나라가 강한 나라다.
서울대 10개 프로젝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면, 나를 극우로 오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내 책장에 있는 책 일부를 보여줘야겠다.
이정도면 좌우 균형이 잘 잡힌 것으로 보이겠지????
아 글이 너무 길어졌네
그냥 반지의 제왕처럼 3부작으로 할걸 그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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