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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이 더 행복해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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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102살 경만이 (218.♡.110.45)
    댓글 댓글 20건   조회Hit 3,796회   작성일Date 24-09-11 11:56

    본문


    내 나이 102살 이름은 경만(京萬) 큰 도시에서 많은 걸 이루라는 뜻이다. 하지만 100년 넘게 살면서 제대로 이룬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나를 꾸짖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102살이라고 하면, 꼬부랑 할아버지를 떠올리겠지만 지팡이 없이 스스로 걸어다닐 줄 아는 건강한 할아버지다. 신체 나이는 82살 정도가 아닐까? 좋아하는 음식은 제육볶음, 롯데리아 양념감자 실비김치맛이다.


    지금 내 머리카락은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솜털만 남아 있는데, 왜 피부는 처음 태어났을 때와 다르게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휘어져 있을까?? 내 얼굴에는 다양한 서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이 내 주름을 만질 때의 손길은 역사의 책장을 넘기듯 조심스럽고 섬세하다. 어쩌면 전립선 문제로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는 이유로 아기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나는 명절을 100번이나 넘게 경험했고, 다른 집안의 명절을 구경하러 가본 적이 있다. 내가 거기서 느낀 점은 우리나라의 명절은 도덕 경진대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인 사람들에게는 명절이 기다려지고 행복하겠지만, 부도덕한 사람들에게는 명절이 피곤하고 권태로워 벗어나고 싶은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 명절이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바로 도덕경진대회에서 부도덕경진대회로 바뀌어야 한다.


    명절은 학생으로서 학업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시작으로, 정해진 나이에 대학교 입학, 군 입대, 취업, 연애, 결혼, 육아를 잘하고 있는지 어른들에게 고백하는 도덕 경진대회다. 이 대회가 시집온 여성들에게 버거운 이유는 각 집안마다 고유의 신념과 철학 그리고 문화적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붕 아래에서 다른 도덕적 기준에 익숙한 이방인에게 다른 심사 기준이 적용되는 도덕경진대회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같은 지붕 아래 살았어도, 다른 지붕 아래에서 살다보면 각자의 고유한 도덕적 기준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도덕 경진대회의 심사 기준은 모호해져 가족들 간에 갈등이 발생한다. 명절에 각종 폭력과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들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 102살 경만이. 사실 이런 풍경은 옛날에도 자주 볼 수 있었다. 1930년대 추석은 정말 혼돈의 카오스였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친일 또는 독립 운동 지지자 등 다양한 정치적 스팩트럼이 같은 지붕 아래 대립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가족 구성원들 간의 깊은 의견 충돌을 넘어 몸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흥부전'에서 놀부의 아내는 흥부에게 밥 주걱으로 뺨을 때리지 않았던가. 더 옛날의 명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경진대회라는 명절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판정 기준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판정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각자 자신만의 모호한 척도로 소중한 가족을 재단한다. 이 가혹한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어떻게 여유로운 웃음이 나올 수 있을까? 이제, 도덕경진대회를 멈추고 부도덕경진대회로 전환해야 한다. 


    부도덕경진대회는 내가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자리가 아닌, 얼마나 부도덕한 사람이었는지를 털어놓는 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명절은 웃음을 자아내는 행복한 명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개그맨들이 부도덕한 술주정뱅이를 연기하며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웃음의 기본 작동 원리일 지도 모른다. 코미디언이 바보 같은 모습, 부도덕한 모습을 보면, "나 정도는 도덕적인 사람이군." 같은 안도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과거 KBS에서 방영한 개그 콘서트가 주말 그것도 일요일 밤에 했던 이유도 부도덕하고 모자른 사람들을 보며, 안도감을 갖고 월요일을 시작할 수 에너지를 심어주기 위함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덕의 시작은 '저 사람에 비해 나정도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라는 생각일 지도 모른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자신감을 갖고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도덕적인 분위기를 그리고 싶다면, 명절마다 부도덕 경진대회를 열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족들 간의 갈등과 강력범죄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102살 경만이의 경험을 들자면 명절에 가족들끼리 모여 나보다 15살 어린 여성을 만나 친구처럼 술을 마셨던 이야기, 음담패설을 재미있게 나누느라 잠자리까지 가지 못했다는 등 부도덕해 보이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명절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듣고 미간이 찌푸려지는가? 걱정하지 마라!! 나보다 15살 어린 여성은 80대 여성이다!!!

    부도덕 경진대회의 핵심은 누군가에게 꼬리를 잡히는 것이다.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도덕을 따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우정은 꼬리를 잡혔을 때 자연스럽게 피어나지 않던가? 명절에 깊은 우애를 꽃피우려면 꼬리를 잡히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부도덕함을 털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


    꼬맹이들이어!! 명절에 어른들 앞에서 부도덕함을 털어놓는 게 걱정되는가? 나 102살 경만이는 명절을 무려 100번 넘게 경험했다. 부도덕함을 자유롭게 털어놓으면 10초 정도 아주 짧게 잔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헤어질 때 어르신들은 마음에 쓰여 도덕적으로 살라는 덕담을 건네며 용돈을 더 두둑하게 건네주시기도 한다. 꼬맹이들이어! 자네들은 10초 일하고 1,000원이라도 벌 수 있는가? 그러니 어린 아이들, 학생들 특히 촉법소년들은 명절에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부도덕함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용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으니!! 


    어쩌면 부도덕 경진대회야 말로 코미디 경진대회일 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내가 a라는 부도덕을 가족들 앞에서 털어놓는다면, 이 이야기를 들은 b는 "나 정도는 도덕적인 사람이군." 같은 안도감을 통해 명절이라는 시간을 더 아늑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부도덕함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를 행복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절은 더 행복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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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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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도덕적인 사람 옆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부도덕한 사람 주변에서는 행복할까요.

    누군가가 망가지는 모습이 정말로 무한한 행복을 줄 수 있다면
    KBS는 왜 매일 아침저녁으로 개그콘서트를 편성하지 않았을까요.

    행복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기에
    100년이 다 가도록 헤매는 것은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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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Q) KBS는 왜 매일 아침저녁으로 개그콘서트를 편성하지 않았을까요?
    A) 부도덕한 이야기는 아침 저녁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프로그램도 사장님의 부도덕함을 폭로하는 프로그램이거든요. 이외에도 저녁에 편성되어 있는 일일 드라마에는 부도덕한 악역들이 등장하잖아요? 개그콘서트만이 부도덕함을 다루는 건 아닙니다. 여담이지만 과거 개그콘서트가 폐지된 이유는 바름, 도덕을 지향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Q) 행복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기에 100년이 다 가도록 헤매는 것은 아닐지요.
    A) 행복이라는 것은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 사회적 성취, 자연과의 교감, 예술을 통한 감동 등은 모두 외부에서 온 자극들이죠. 다시 말해,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잘못된 방향이거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삶을 100년 넘게 지속하면서 형성된 나, 102살 경만이라는 존재의 구성 요소를 살피면 내면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게 더 많죠. 나와 타인 그리고 내가 처한 환경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감정과 경험의 총체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을 내 안에서 찾고 싶다는 말은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겠다.", "모험을 하지 않겠다" 라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나 102살 경만이가 창훈 청년에게 말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모험을 하세요. 행복은 내 안에 없습니다. 행복은 존재 밖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나 자신이지요. 그리고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싶다면 지식을 부지런히 섭취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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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제 주관적인 경험으로, 누군가의 부도덕함이 제게 웃음이나 즐거움을 주지는 않네요.

    나의 내면과 외부의 자극이 만나 행복으로 드러날 때,
    1) 그 행복이 내 안으로부터 우러 나오는지, 2) 외부에서 생성돼 내게로 건너 오는지 묻는다면
    저는 1) "내 안으로부터 우러나온다"고 답하겠습니다.

    "행복은 내 안에 있다"는 인식이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겠다", "모험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변화하는 근거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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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Q) 제 주관적인 경험으로, 누군가의 부도덕함이 제게 웃음이나 즐거움을 주지는 않네요.
    A)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창훈 청년은 지식이나 상상력이 부족한 게 원인이겠죠. 부도덕은 도덕보다 영토가 넓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의 부도덕함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려면, 부도덕이라는 넓은 세상을 머릿 속으로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이나 지식이 갖춰져야 합니다. 아니면 부도덕에 대한 열린 자세가 갖춰지지 않은 게 원인이겠죠. 그래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거겠죠.

    Q) "나의 내면과 외부의 자극이 만나 행복으로 드러날 때, 내 안으로부터 우러나온다." 라고 생각한다.
    A) 그게 제가 댓글에서 한 말입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고, 그건 본인이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에 있는 요소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산물들을 발견한 게 행복이다.

    Q) "행복은 내 안에 있다"는 인식이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겠다", "모험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변화하는 근거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A)  "행복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기에, 100년이 다 가도록 해매는 것은 아닐지요." 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이 말을 '행복은 내 안에 있으니, 해매지 말라.' 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경험이나 모험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에 가깝겠죠?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겠다. 모험을 하지 않겠다라는 의지처럼 느껴진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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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102살 경만님의 지식이나 상상력 하에서는 부도덕의 영토가 도덕의 영토보다 넓은지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의 도덕의 영토는 경만님의 부도덕과 도덕의 영토를 합친 것보다도 넓을지 모릅니다.

    100년 동안 바깥을 모험하고도 행복과 가까워지지 못했다면 이제는 내 안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 아닐까요.

    경만님께서 '누군가가 망가지지 않고도 솟아나는 행복'을 찾아 우뚝 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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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Q) 다른 누군가의 도덕의 영토는 경만님의 부도덕과 도덕의 영토를 합친 것보다도 넓을지 모릅니다.
    A)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도덕은 지구라면, 부도덕은 우주에 가깝습니다. 도덕이라는 건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하나의 가치 체계잖아요? 부도덕함을 도덕적 기준에 반하는 걸 떠올릴 수 있는데요. 도덕적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영역도 부도덕함으로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고로 도덕의 영역은 부도덕의 영역보다 넓을 수 없습니다.

    Q) 100년 동안 바깥을 모험하고도 행복과 가까워지지 못했다면 이제는 내 안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 아닐까요.
    A) 저는 행복에 가까워지지 못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글을 잘못 읽으셨거나, 제가 잘못 썼거나 둘 중 하나겠죠. 모든 글은 자신의 세계를 들여다 본 결과물이죠? 이미 들여다 본 것이겠죠. 추가로 저는 누군가를 망가트려야 행복하다고 말한 적은 없죠. 행복한 명절이 그려지려면 이제 도덕경진대회의 풍경이 아니라, 부도덕경진대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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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보통의 경우, "저녁 식사로 아구찜을 배달받아 먹었다", "할머니 집에서 하루 자고 왔다"와 같은 사건은
    그 기준을 정하기 전까지 도덕으로도 부도덕으로도 분류할 수 없습니다.

    기준이 안 정해졌는데 그 대상이 기준에 미치는지 미치지 못하는지 어떻게 미리 아나요.
    도덕의 영토가 지구만 하다면 부도덕의 영토도 지구만 하고, 아직 도덕도 부도덕도 아닌 영토가 우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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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정리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도덕의 영토가 지구만 하다면 부도덕의 영토도 지구만 하고, 아직 도덕도 부도덕도 아닌 영토가 우주만 합니다."라고 말하셨는데,
    윗 댓글에서는 "102살 경만 님의 지식이나 상상력 하에서는 부도덕의 영토가 도덕의 영토보다 넓은지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의 도덕의 영토는 경만 님의 부도덕과 도덕의 영토를 합친 것보다도 넓을지 모릅니다."라고 말하셨죠?

    생각이 오락가락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우주와 지구로 비유한 이유는 도덕과 부도덕이 대칭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걸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도덕함은 단순 도덕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죠.

    어쩌면 명확한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말꼬리만 잡는 걸 즐기는 것일 지도 모르죠. 마치 조선시대 명절에 펼쳐진 도덕경진대회 심사위원과 대화하는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102살답게 답해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귀찜을 먹는 것이 도덕적 또는 부도덕한 행위로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행위가 반드시 기준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니죠. 또한 기준이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도덕적, 부도덕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과도한 일반화입니다.

    물론 도덕과 부도덕을 상대적인 기준으로 바라보며, 그 경계를 허물려고 한 생각은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도덕의 기본 원리와 사회적 가치 체계의 존재를 바라보지 못한 듯합니다. 도덕과 부도덕을 대칭적인 관계로 가정해 놓고, 기준이 없으면 도덕적 판단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이 이상은 말을 아끼겠습니다.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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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도덕으로든 부도덕으로든 기준으로 구겨넣을 수 있는 세계는 극히 일부이기에
    아직 기준조차 서지 않은 영토가 (도덕이나 부도덕에 비해) 끝없이 더 크다는 의미에서
    도덕이나 부도덕이나 지구만 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도덕의 영토가 더 크기도, 부도덕의 영토가 더 크기도 하겠지만
    우주와 비교하고 있으니 무엇이 지구만 하고 무엇이 달만 하든 사소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경만님의 도덕 크기가 달만한 것을 보고 부도덕의 크기도 달만 하리라 생각했고,
    도덕 크기가 지구만 한 사람 앞에서는 자잘해질 거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경만님의 부도덕은 태양만 하네요!

    아직 도덕도 부도덕도 아닌 땅을 부도덕으로 간주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미처 설명되지 않은 새 말 새 몸짓이 도덕에 가까우리리라 기대한다면
    행복이 벌써 다가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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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도덕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시죠? 왜냐면 공허한 말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거든요.
    혹시 니체나 사르트르나 미셸 푸코 관련 서적 본 적 있나요?
    부도덕경진대회에서 큰 틀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이거든요. 장 자크 루소도 떠올릴 수 있겠지만요.
    혹시 읽어본 적이 없으시다면 저랑 같이 읽어보시죠.

    "아귀찜을 배달받아먹었다." 이걸 도덕적으로 볼 수 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내가 칼을 휘둘렀다.' 이걸 도덕적으로 볼 수 있나요? 당연히 없죠.
    왜냐면 행동의 의도, 결과, 맥락과 상황 등 도덕적 가치 평가를 위한 재료들이 빠져 있잖아요?

    사실 아까 "저녁 식사로 아귀찜을 배달받아먹었다", "할머니 집에서 하루 자고 왔다"를 예시로 드는 순간, 빈 수레는 아닐 거라는 믿음을 갖고 제가 말한 거였는데요. 그런데 이 댓글을 보니 제가 맹목적 믿음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댓글로 나눈 모든 대화가 공허하게 다가오네요.

    순대국밥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순대국밥에 대해 논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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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23.♡.165.54) 작성일 Date

    저는 도덕이 무엇인지 충분히 깊이 고민하지 않았지만,
    경만님과 제가 논의해 온 내용은
    '도덕의 의미'보다도 '도덕을 다루는 태도'와 더 관련이 깊습니다.

    니체나 샤르트르나 미셸 푸코를 읊어도 원래부터 공허한, '도덕'이라는 개념이나 '도덕을 다루는 태도'가 알맹이로 가득 차지는 않습니다.
    개념도 태도도 어떤 계기들이 얽혀 잠시 드러날 뿐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아무에게서 잠시 드러난 것을 내게로 옮겨 올 수도 없습니다.
    도덕에 대한 말과 글을 더 외운다고 해서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도덕을 더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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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아!!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현타가 아주 강하게 왔지만 명료해졌습니다!

    사실 위 세 사람을 언급한 이유는 이들의 책을 보면, '도덕을 다루는 태도'에 대해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거든요.
    근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부도덕경진대회는 부도덕한 행동을 자랑하는 자라니까 나빠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결과보다 맥락을 보거든요. 고로, 이 세 사람의 책을 보고 나면, 도덕 경진대회를 논할 때 결과만 보고 판단하던 것에서 맥락까지 보게 됩니다. 초 단위로 분절되어 있는 독립된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고 평가하는 게 니라, 장편 영화처럼 보게 되는 거겠죠. 사실 창훈청년을 보면서 우리 조선시대 사람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근대적인 느낌이 강했거든요.
    물론 어렵죠.. 저도 어렵고 난해합니다. 그래서 저 또한 어긋나고 부족한 부분이 당연히 있을 겁니다.

    사실 도덕경진대회야 아무렇게 논할 수 있지만, '도덕을 다루는 태도'에 대해 논하는데 이들의 책도 보지 않은 상태라면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우린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튼 덕분에 이 분들의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감사합니다!

    추석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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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저희는 '부도덕한 행동'의 선악을 논하지 않았고
    '다른 이의 부도덕함으로부터 행복을 찾으려는 경만님의 태도'에 대한 선악을 논했습니다.

    102년 생애 동안 저보다 몇 배나 많은 책을 읽고선,
    그 많은 지식을 고작 이렇게 사용하시나요.
    인간으로서 의식이 붙어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는데
    누구를 딴 길로 꾀어 내려는 동안 경만님 본인조차도 제자리걸음할 뿐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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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저는 다른 이의 부도덕함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질 않았는데요?
    그런 내용이 어디에 있나요?

    이 글은 행복한 명절에 대해 말한거지, 저의 행복에 대해 말하질 않았는데요?

    제가 다룬 내용에 대해 논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르는 걸 아는 것처럼 말하고, 제가 말하지도 않은 걸 있는 것처럼 말하고.
    어디 아프신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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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 제가 아주 아주 촌스럽지만 설명하겠습니다!

    Q. 경만이는 다른 이의 부도덕함으로부터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가?
    A. 이 글에서 제 행복에 대해 단 1도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 그려지는 행복한 명절에 대해 말하고 있죠.

    Q.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당신은 누군가의 부도덕함에서 행복을 느끼나?
    A. 어떤 부도덕이냐에 따라 다르다. 부도덕은 웃음을 자아낼 수 있고 어쩌다 행복의 실마리가 될 수 있도 있겠죠. 여기서 부도덕에 대해 조금 더 다뤄보겠습니다. 저는 도덕보다 부도덕에서 주체성과 고유성이 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인 행동을 한 A와 부도덕한 행동을 한 B 중 누가 더 주체적이고 자기 자신에 가까울까? 저는 B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의 도덕은 자신의 본성과 본능을 억누른 것에 가까우니까요.
    부도덕함은 황당한 것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도덕의 영역은 모두가 예측 가능하거든요. 영화 기생충을 보더라도 주인공부터 부도덕하지 않습니까?

    사실 부도덕경진대회를 제대로 표현하자면 주체력 경진대회, 고유력 경진대회, 황당력 경진대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주체력, 고유력, 황당력이라 하면 또 다른 바름을 요구하는 도덕적 강요 같잖아요? 그래서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더 추상화된 부도덕 경진대회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제가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들여다 보려면 많은 관심과 사랑, 상상력이 필요하겠죠?

    마치며)

    다시 말하지만, 이 글에는 다른 이의 부도덕함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명절에 가족들끼리 자신의 주체성과 고유성이 깃든 부도덕함을 나누는 풍경이 그려진다면 행복이 드러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죠. 여기서 제가 가리키는 행복은 어디에 있나요? 부도덕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죠? 더 촌스럽게 설명하자면, 부도덕까지 나눌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거에 가깝겠죠? 그리고 이 내용은 글에도 있죠.
    "진정한 우정은 꼬리를 잡혔을 때 자연스럽게 피어나지 않던가?"

    저는 누군가를 딴 길로 꾀어 내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 처음부터 기저귀를 차고 다닌다는 둥 과장으로 시작되었잖아요? 이 과장된 표현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이 사람은 오바가 심하구나." 라는 첫인상을 갖고 글을 읽게 됩니다. 이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 저만의 유머인거죠.

    사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반응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창훈 청년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랬고요.

    제가 다른 댓글에서도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같은 걸 물어보시면, 저는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 답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명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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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경만님에게 있어 '부도덕'이 '1)웃음을 자아낼 수 있고 2)어쩌다 행복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으며 3)경우에 따라 주체력, 고유력, 황당력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는 무언가'라고 선언하신다면, 더 이상 '부도덕'을 놓고 논의할 수 없습니다.
    개념 정의를 넓게 하면 할수록 개념을 하나도 정의하지 않은 상태와 마찬가지가 되고, 그 개념이 담아 내는 정보가 0으로 수렴합니다.

    "누구를 딴 길로 꾀어낸다"라고 함은
    유불리에 따라 논점을 이리저리 어지럽히는 행위를 가리킨 것입니다.

    경만님의 글에 댓글을 단 것은
    경만님의 글에서 제 주의를 사로잡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는 무언가가 비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왜 지나치지 못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설명해야 했고, 위의 글들은 제가 저 자신에게 건네는 답 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한 단락 한 단락 준비하며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이만큼이나 많이 배운 것은
    (경만님께서 그동안 섭취하신 지식의 양이 방대하기에)
    논의 중 경만님으로부터 무심하게 뿜어 나오는 지식을 제가 틈틈이 섭취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못마땅하셨겠지만, 이 치열함이 경만님께 행복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한가득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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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돌맨님의 댓글

    벽돌맨 아이피 (211.♡.110.108) 작성일 Date

    오! 부도덕과 도덕 재미있는 주제인 것 같아 저도 끼어 들어보겠습니다.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 언뜻 보면 도덕적인 것이 선한 것, 부도덕한 것이 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덕경진대회” 명절이 문제 되는 이유는 각자 다른 문화, 생활, 수준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각자가 가지는 도덕적인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명절의 모습은 대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갑,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을인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적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도덕적 기준을 강요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이 아이를 낳는 것이라면 “왜 아이를 낳지 않냐?"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취업을 하는 것이 나의 도덕적 기준이라면 "왜 취업을 하지 않냐?"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은 아이를 낳는 것이, 취업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이처럼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질문은 하나의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물리적인 힘으로 행하는 학교 폭력과 마찬가지로 나이라는 권력으로 질문을 가장한 폭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읽고 있는 어른들은 ”요즘 젊은 애들한테는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볼멘소리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동안 자신들이 해온 말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모습일 뿐입니다. 이것은 저의 억측입니다만, 사람들은 권력을 이용한 폭력적인 질문을 통해 상대보다 내가 우월하고 도덕적이라는 생각과 감정을 가지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글에서 말한 대로 우리의 명절이 ”부도덕경진대회"로 바뀐다면 어떤 모습이 그려지게 될까요? "부도덕"은 자기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운 도덕적인 기준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 “부도덕”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의 명절은 타인에게 나의 도덕적 기준을 강요하는 “폭력”이 아니라 나의 도덕적 기준을 바탕으로 부도덕을 “고백”하는 모습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나의 부도덕함을 고백함으로써 상대와 더 가까워진달지, 행복해진달지 하는 변화가 일어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덕경진대회" 보다는 나은 모습의 명절이 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서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죠!

     "도덕경진대회" 명절의 대안으로 "부도덕경진대회"를 열자는 아이디어는 102살이지만 나이의 틀에 갇히지 않는 번뜩이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부도덕을 고백하는 “부도덕경진대회”를 넘어 어떤 삶의 변화를 이루었는지 말할 수 있는 "새말 새 몸짓" 경진대회가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백하기는 쉽지만 행동하는 것은 어려우니까요. 이번 명절에는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강요하는 질문에 경만이처럼 자신 있게 대답해야겠습니다. "나를 꾸짖을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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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반갑습니다 벽돌맨님.

    문화, 생활, 수준에 따라 도덕의 기준이 다르다면
    부도덕의 기준도 문화, 생활, 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부도덕이 자기반성을 기반으로 하든 말든,
    누군가가 기준을 정해 상대의 자발성을 제한한다면
    결국 폭력의 성격을 띱니다.

    벽돌맨님께서 제안하신 "어떤 삶의 변화를 이루었는가"는
    도덕이나 부도덕과 달리 우주를 다 담아 낼 기준일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이상 우주의 (아마) 모든 존재와 공간이 운동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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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오~~ 선 공감, 후 의견제시. 이런 화법을 사용해야 예쁜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이군요!
    저도 102살이지만, 백돌맨씨처럼 말을 한다면 예쁘고 건강한 80대 여성을 만날 수 있겠죠?

    저도 부도덕경진대회보다 새말새몸짓 경진대회가도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새 말, 새 몸짓은 부도덕이라는 우주에서 인간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행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새말과 새 몸짓은 부도덕이라는 우주 어딘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말, 새로운 몸짓이라 하면 어떤 게 떠오르나요?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있을 것이고요. 중세시대에 과학과 의학을 말하는 것,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 기계, 핸드폰과 컴퓨터를 등장시킨 부도덕 올림픽인 전쟁, 여학생들의 외모를 비교하는 부도덕함에서 시작된 페이스북 등이 있겠죠.

    부도덕이라는 우주에서 새말, 새 몸짓으로 이끌어낸 국가들을 보면 대부분 선진적이거나 선도적인 경우가 많죠.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해부학의 시작이 이탈리아 볼로냐 의과 대학이고, 볼로냐 의사들은 중세시대 페스트와 맞서 싸운 걸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유럽의 선진적이고 선도적인 의과대학은 이탈리아가 아닌, 스웨덴이나 영국에 있죠.

    선진적이고 선도적인 새말과 세몸짓은 부도덕이라는 우주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부도덕'에 거품을 문다면 조선인일 것이고, 웃어넘긴다면 중진국 사람일 것이고,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부도덕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있다면, 새말과 새 몸짓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제 나이가 102살이잖아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조선사람입니다. 조선사람과 대화하다가 한국 사람과 대화를 하니 기분이 묘하네요. 조선사람이었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제사를 지내고, 우리 한국사람들인 손자와 손녀 그리고 중손자와 중손녀를 만나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조선사람도 한국사람도 아닌 내 사람인 우리 아들과 딸은 꼬옥 안아줘야겠습니다. 그래야 늙은 저에게 용돈을 두둑히 챙겨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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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살 경만이님의 댓글의 댓글

    102살 경만이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아! 제가 산책하다가 벽돌맨님이 갑자기 떠올라서 댓글을 남깁니다.
    벽돌맨님의 댓글을 보면, '부도덕'은 자기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여기서 굳이~ 굳이~ 촌스럽게 말해보자면, 제가 생각하는 부도덕은 주체성, 고유성 확립이 더 가깝습니다.

    도덕이라는 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나에게 씌워진 가면이잖아요? 부도덕경진대회는 사회가 나에게 씌워놓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 자신으로 살아보자는 뜻이 있습니다.

    102살인 제가 15살 어린 여성(80대 할머니)과 처음 보는 자리에서 친구처럼 술을 마시며, 음담패설을 나누느라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여기서 핵심은 저를 포함한 모든 노인들에게 주입된 기존의 가치를 버리고 저만의 가치를 만든 것입니다.
    고로 부도덕경진대회의 시작은 니체가 말하는 도덕적 가치의 전복이지만 끝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에 가깝습니다.

    만약 “102살 할아버지가 왜 점잖지 못하게 음담패설을 하냐?”라는 꼬리를 잡히게 되었을 때는 “그냥!”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가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시 삶의 주인이 나였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니까요.

    뭐 예를 들면, "100살 넘은 노인도 사랑을 말하고 싶었다. 부도덕함에 무게를 두느라 음담패설만 말했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의 대부분은 사랑이었다." 라고 답할 수 있겠죠?

    더 길게 답을 하게 된다면 삶을 들여다 보고 자신이 스스로 정의를 내린 내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
    나는 102살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일제 강점기였고, 집에 오면 매일 2시간 동안 무릎 꿇고 앉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훈계를 들었고. 정략결혼, 해방 후 전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사회 등으로 인해 나는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항상 노예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매일 일에 쫓기느라 밖에서 지내다 잠깐 집에 들어갔다 나오면, 애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로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어쩌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사랑에 열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사랑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느라 음담패설이 나오게 되었다.
    **

    부족하지만 대충 이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자기만의 가치를 쫓기 위해 도덕이 아닌 부도덕으로 향한 걸 공유하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도덕경진대회라 생각합니다.
    명절에 펼쳐지는 부도덕경진대회는 가족 개개인의 고유성과 주체성이 확립되어 나가는 과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더 행복해질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내용까지 다루기 시작하면 또 다른 도덕경진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보일 수 있고. 개인적으로 재수 없거든요. 그래서 생략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벽돌맨님이 깊이 있게 다뤄주셔서 저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