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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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택일의 역사의식에 대해서 논함>
약 백년전 국권이 사라졌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자료와 증거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과거 제국들이 난립하고 그 경향에 맞추어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땅이 속국이 되었다.
그 중 하나인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대의 조직이 힘의 계약과 논리에 의해 파괴되었다.
정복자가 파괴한 것은 다름아닌 한반도 위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믿음이다. 그들의 눈에 한낱 잡초로 보였던 그것들은 그들에게조차 매우 낯선 식물일 뿐만 아니라 그 식물을 자라나게할 토양조차 그들에게 있어서 이질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정복자가 되기위해서 그들이 했던 변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토양과 식물은 갈아 엎어지고 대체되면서 기존의 것들은 다른 것들이 되었다. 다시말해, 변화를 야기시키는 설계자들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욕망이 토착적 믿음의 신자들과 충돌로 인해 여러 욕망들을 탄생시켰다.
-누군가는 너무나 빠른 변화로 인해 자신들이 원하는 변화가 좌절된 것에 대해 좌절했다.
-다른 누군가는 변화의 필요가 그 어떤 형태로든 좋은 것임을 자신의 증오와 원망 속에서 인정하며정복자를 구원자로 여기며 강한 자들을 따랐다.
- 또 누군가는 자신의 세대에 걸려든 이 역사적 격동을 온전히 맞아들인채 삶을 영위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변화속에서 변하지 않은 것을 포착했다. 그것은 하나의 욕망이며 힘 그 자체를 따르는 것. 그것에 충실하면 할 수록 그리고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면 할 수록 기약된 충만한 존재감에 도달될 수 있다는 믿음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현실적인 힘을 따르면서도 그 힘을 소유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토양과 식물을 심으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하면서도 변화를 긍정한다. 다시말해, 정복자들이 이끌고온 그 변화가 아닌 스스로의 변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성을 즉, '탓'이 있음을 통해서 그것을 책임지려하는 자다. 이전의 토양은 메말라 갔고 거기에서 이따금씩 자라난 식물들은 생명의 상징이 아닌 죽음의 상징이었음을 인정하며 그것의 새로운 토양과 식물을 심어야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대체제가 정복자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것은 거부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변화된 사실을 다시 한번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믿음은 조선도 아닌 정복된 조선도 아닌 그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었다.
이 여러 욕망들은 당시대의 주체들을 추동시키고 다시금 그것들이 부정되거나 또 부정되면서 그들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
아, 불과 약 100년전 이 역사적 소용돌이가 도대체 한 인간에게 어떠한 삶을 떠맡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시험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자신들이 현재에 빠져있음은 인식하고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한채 수많은 자료속에 파뭍혀서 그것을 편집하고 조립하여 눈 앞에 놓은채로 '예 또는 아니오, yes or no, Ya oder Nein, oui ou non'만을 판단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욕망에 그리고 어떤 잉여적향유에 빠져 있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닌가? 마치, 영화관 스크린 속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무관심함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놓여 있듯이 그렇게 역사자체에 대해서는 몰이해속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현재의 관점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과거 정복자였던 자들의 치를 떨게하는 만행에 있어서 역사의식이라는 가느다란 실에 의존해 충분히 분기탱천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도대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곳이 무엇이고 어디인지 망각한 채 정복자들의 논리에 편승해 그들의 행위를 제3자의 관점에서조차도 아닌 긍정적 평가로까지 나아가야하는 것일까?
이 이분법적인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만이 진리이며 빛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경계하자. 그들은 어차피 같은 욕망의 구조속에서 다른 주장이 아닌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은 안전함을 맹신하고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자신들에게 해당하지 않음을 즉, 그런 안전함을 강박적으로 지키고 고수하면서 철저히 위협되는 것을 배제하는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더 잘 알고 더 잘 믿으며 더 잘 지킨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 꺼진 불을 다시 보는 자들이 아니라 불 자체를 없에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꺼진 불에서만 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언제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요. 그것은 실체하며 언제나 외부에서 내부로 침투해오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외부가 더 이상 없는 지금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국가가 지금 여기에 있고 식민지배를 벗어난 국가 역시 지금 여기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식민은 더 이상 없으며 과거에 비해서 자신의 사정이 얼마나 더 유복한지를 깨닫고 심지어 뜨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들을 평가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삶을 부정하기도 한다. 언제나 실험실속에서의 피실험자를 대하는 실험자처럼 말이다.
'지배자가 꿈꾸는 지배는 완전한 지배로써 피지배자가 자신들이 지배받지 않고 있음을 굳게 믿고 있는 상태이며 지배자 조차도 자신이 지배하고 있음을 모르는 상태다.'
과거에 그것이 충분히 유려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상부구조에서부터 대체시키는) 이루어졌다면, 현재 그들이 비판하고 증오하며 냉정하게 바라보는 과거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안전함'조차도 하나의 도그마 속에서 있으며 그 도그마는 존재방식 자체에 편입되어 있음이다.
둘로 쪼개진 것은 역사논쟁속에서 그리고 정치에서 그리고 정치체제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몫이 있는 자들과 몫이 없는 자들에게 나타난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각자의 주장과 목소리는 서로의 몫을 더 많이 챙기는지 그리도 양보할 수 있는지 또 포기할 수 있는지에 따른 갈등이다. 그러한, 유치한 싸움에서 언제나 몫이 없는 자들은 소외된다. 여기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소외의 보상체계가 몫이 없는자들은 몫이 있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얼마없는 몫까지 바쳐가면서 그들 사이의 투쟁을 지지하면서 나타난다. 몫이 있는 자들끼리의 싸움에서 이긴자들은 그들이 행해왔던 일관적인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보상하고 그 보상을 보는 몫이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걸맞는 몫으로써 소모적 쾌락을 얻는다. 여기에는 어떠한 역사의식도 어떠한 책임의식도 어떠한 독립운동가의 정신도 어떠한 새로운 해석에 대한 도전도 없으며 언제나 현재를 끊임없이 연장시키는 팔루스적 욕망만이 떠돌아 다닌다.
여기서 하나의 추론을 얻을 수 있다.
갈등은 강박적으로 외부에 대한 적대자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안전함을 과시하고 은연중에 나타나는 각자에 대한 '몫'의 투쟁이라면, 반대로 진정한 위협이 보이지 않은채 지극히 현대적 증상으로써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역사의 관점에서 '현대적 강점기'라부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적 합리성과 보편성으로 잡을 수 없는 인간의 존재방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지배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더욱 은밀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더욱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100년전의 역사적 사건의 의의가 나타난다. 지배를 지배라고 하기도 무색한 이 시대에 도대체 지배의 원인자가 자기자신임을 인정해야 하는 이 시대에!
이미 언급란 마지막 유형의 주체들이 실천한 그 고독하고 비참하며 오로지 자신들의 믿음만을 다시금 믿었던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정신운동이 필요하다! 현실은 가상이라 생각하며 그 가상속에서 다른 가상을 믿고 그것을 역사속에 실현해 나가는 그런 자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약 백년전 국권이 사라졌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자료와 증거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과거 제국들이 난립하고 그 경향에 맞추어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땅이 속국이 되었다.
그 중 하나인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대의 조직이 힘의 계약과 논리에 의해 파괴되었다.
정복자가 파괴한 것은 다름아닌 한반도 위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믿음이다. 그들의 눈에 한낱 잡초로 보였던 그것들은 그들에게조차 매우 낯선 식물일 뿐만 아니라 그 식물을 자라나게할 토양조차 그들에게 있어서 이질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정복자가 되기위해서 그들이 했던 변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토양과 식물은 갈아 엎어지고 대체되면서 기존의 것들은 다른 것들이 되었다. 다시말해, 변화를 야기시키는 설계자들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욕망이 토착적 믿음의 신자들과 충돌로 인해 여러 욕망들을 탄생시켰다.
-누군가는 너무나 빠른 변화로 인해 자신들이 원하는 변화가 좌절된 것에 대해 좌절했다.
-다른 누군가는 변화의 필요가 그 어떤 형태로든 좋은 것임을 자신의 증오와 원망 속에서 인정하며정복자를 구원자로 여기며 강한 자들을 따랐다.
- 또 누군가는 자신의 세대에 걸려든 이 역사적 격동을 온전히 맞아들인채 삶을 영위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변화속에서 변하지 않은 것을 포착했다. 그것은 하나의 욕망이며 힘 그 자체를 따르는 것. 그것에 충실하면 할 수록 그리고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면 할 수록 기약된 충만한 존재감에 도달될 수 있다는 믿음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현실적인 힘을 따르면서도 그 힘을 소유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토양과 식물을 심으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하면서도 변화를 긍정한다. 다시말해, 정복자들이 이끌고온 그 변화가 아닌 스스로의 변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성을 즉, '탓'이 있음을 통해서 그것을 책임지려하는 자다. 이전의 토양은 메말라 갔고 거기에서 이따금씩 자라난 식물들은 생명의 상징이 아닌 죽음의 상징이었음을 인정하며 그것의 새로운 토양과 식물을 심어야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대체제가 정복자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것은 거부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변화된 사실을 다시 한번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믿음은 조선도 아닌 정복된 조선도 아닌 그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었다.
이 여러 욕망들은 당시대의 주체들을 추동시키고 다시금 그것들이 부정되거나 또 부정되면서 그들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
아, 불과 약 100년전 이 역사적 소용돌이가 도대체 한 인간에게 어떠한 삶을 떠맡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시험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자신들이 현재에 빠져있음은 인식하고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한채 수많은 자료속에 파뭍혀서 그것을 편집하고 조립하여 눈 앞에 놓은채로 '예 또는 아니오, yes or no, Ya oder Nein, oui ou non'만을 판단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욕망에 그리고 어떤 잉여적향유에 빠져 있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닌가? 마치, 영화관 스크린 속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무관심함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놓여 있듯이 그렇게 역사자체에 대해서는 몰이해속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현재의 관점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과거 정복자였던 자들의 치를 떨게하는 만행에 있어서 역사의식이라는 가느다란 실에 의존해 충분히 분기탱천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도대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곳이 무엇이고 어디인지 망각한 채 정복자들의 논리에 편승해 그들의 행위를 제3자의 관점에서조차도 아닌 긍정적 평가로까지 나아가야하는 것일까?
이 이분법적인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만이 진리이며 빛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경계하자. 그들은 어차피 같은 욕망의 구조속에서 다른 주장이 아닌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은 안전함을 맹신하고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자신들에게 해당하지 않음을 즉, 그런 안전함을 강박적으로 지키고 고수하면서 철저히 위협되는 것을 배제하는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더 잘 알고 더 잘 믿으며 더 잘 지킨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 꺼진 불을 다시 보는 자들이 아니라 불 자체를 없에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꺼진 불에서만 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언제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요. 그것은 실체하며 언제나 외부에서 내부로 침투해오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외부가 더 이상 없는 지금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국가가 지금 여기에 있고 식민지배를 벗어난 국가 역시 지금 여기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식민은 더 이상 없으며 과거에 비해서 자신의 사정이 얼마나 더 유복한지를 깨닫고 심지어 뜨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들을 평가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삶을 부정하기도 한다. 언제나 실험실속에서의 피실험자를 대하는 실험자처럼 말이다.
'지배자가 꿈꾸는 지배는 완전한 지배로써 피지배자가 자신들이 지배받지 않고 있음을 굳게 믿고 있는 상태이며 지배자 조차도 자신이 지배하고 있음을 모르는 상태다.'
과거에 그것이 충분히 유려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상부구조에서부터 대체시키는) 이루어졌다면, 현재 그들이 비판하고 증오하며 냉정하게 바라보는 과거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안전함'조차도 하나의 도그마 속에서 있으며 그 도그마는 존재방식 자체에 편입되어 있음이다.
둘로 쪼개진 것은 역사논쟁속에서 그리고 정치에서 그리고 정치체제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몫이 있는 자들과 몫이 없는 자들에게 나타난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각자의 주장과 목소리는 서로의 몫을 더 많이 챙기는지 그리도 양보할 수 있는지 또 포기할 수 있는지에 따른 갈등이다. 그러한, 유치한 싸움에서 언제나 몫이 없는 자들은 소외된다. 여기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소외의 보상체계가 몫이 없는자들은 몫이 있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얼마없는 몫까지 바쳐가면서 그들 사이의 투쟁을 지지하면서 나타난다. 몫이 있는 자들끼리의 싸움에서 이긴자들은 그들이 행해왔던 일관적인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보상하고 그 보상을 보는 몫이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걸맞는 몫으로써 소모적 쾌락을 얻는다. 여기에는 어떠한 역사의식도 어떠한 책임의식도 어떠한 독립운동가의 정신도 어떠한 새로운 해석에 대한 도전도 없으며 언제나 현재를 끊임없이 연장시키는 팔루스적 욕망만이 떠돌아 다닌다.
여기서 하나의 추론을 얻을 수 있다.
갈등은 강박적으로 외부에 대한 적대자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안전함을 과시하고 은연중에 나타나는 각자에 대한 '몫'의 투쟁이라면, 반대로 진정한 위협이 보이지 않은채 지극히 현대적 증상으로써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역사의 관점에서 '현대적 강점기'라부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적 합리성과 보편성으로 잡을 수 없는 인간의 존재방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지배라고 하기도 무색하게 더욱 은밀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더욱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100년전의 역사적 사건의 의의가 나타난다. 지배를 지배라고 하기도 무색한 이 시대에 도대체 지배의 원인자가 자기자신임을 인정해야 하는 이 시대에!
이미 언급란 마지막 유형의 주체들이 실천한 그 고독하고 비참하며 오로지 자신들의 믿음만을 다시금 믿었던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정신운동이 필요하다! 현실은 가상이라 생각하며 그 가상속에서 다른 가상을 믿고 그것을 역사속에 실현해 나가는 그런 자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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