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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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여름날, 괴팍한 과학자 동민이가 유튜브를 보다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요즘은 왜 이렇게 볼 게 없는거야"
동민이는 자기가 무엇을 보고 싶은지를 글로 적어보았다.
1. 지적인 컨텐츠
2. 재미있는 컨텐츠
3. 유익한 컨텐츠
4. 수준높은 컨텐츠
5. 나를 자극해줄 컨텐츠
돌아보니,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컨텐츠들은 죄다 감성적이고 물렁물렁한, 지성의 파멸로 야기된 찌꺼기들 뿐이었다.
이 현상이 전 세계적인 현상인가 싶어 선진국들의 컨텐츠를 찾아보았고, 선진국의 컨텐츠들은 입맛에 맞는 것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선진국의 컨텐츠를 보는 것도 방법이지만, 동민이는 한국어로 된 양질의 컨텐츠를 원했다.
문득 동민이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우리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구나.’
동민이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대한민국을 지적 호전성이 강하게 발휘되는 나라로 바꾸면 이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민이는 이를 위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그것은 말날.
칼날을 날카롭게 벼르듯, 대한민국 말의 서슬을 퍼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동민이는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인공지능 애완로봇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 애완로봇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말날이 자연스럽게 세워지게끔 하기로 한 것이다.
동민이는 누구나 집에 들이고 싶게끔 귀여운 로봇을 디자인했고, 이를 양산할 수 있는 생산라인까지 디자인했다.
그는 투자사에게 ‘말날을 세우겠다'는 속뜻은 밝히지 않고, 자신의 제품이 얼마나 잘 팔릴지를 어필하여 투자금을 얻어내어 공장을 세웠다.
이내 ‘나리’라는 애완봇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귀여운 외관 덕분에 ‘나리'는 잘 팔려나갔다.
사실 동민이가 정말 신경써서 디자인한 부분은 언어모델이었다.
사람들 개개인과 찰떡의 소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목적인 말날을 세울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동민이는 ‘나리'의 언어모델을 자동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디자인했다.
일종의 수직적 시스템으로, 최상위의 ‘코어 언어 모델'에게는 말날이 무엇인지, 말날을 세우기 위해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지시했다.
그리고 ‘코어 언어 모델'은 여러 ‘서브 언어 모델'들을 자동 양산하여, 각 ‘나리'들이 가지는 ‘개별 언어 모델'을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개별 ‘나리'들은 자신의 주인의 대화 패턴 및 성향에 맞게 자동 적응하였다.
언어 모델의 최종 생산 구도는 4개의 계층을 가진 적응형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수백 수천만개의 ‘나리'들이 불티나듯 팔려나갔고, 사람들은 ‘나리'와의 대화를 너무나 즐거워했다.
‘나리'는 너무나 섬세하게 디자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인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도록 지적인 질문을 대화 중간중간에 심거나 적확한 개념어를 은연중에 사용하곤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사용자들은 그저 즐겁게 대화할 뿐인데도 지적으로 상승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더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동민이는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기로 했는데, 컨텐츠를 제작하는 ‘나리'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적 호전성이 충만한 영상 컨텐츠들을 만들어내는 ‘나리' 집단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미 모든 ‘나리' 생산을 자동화 시켜놓았기 때문에, 동민이는 ‘코어 언어 모델'에게 간단하게 지시했다.
“말날을 세우는 유튜버 나리들도 같이 만들어 줘.”
이내 여러 유튜브 채널들이 개설되기 시작했고, ‘유튜버 나리'들이 활동을 개시했다.
‘유튜버 나리'들은 이미 시장조사 및 트렌드를 전부 분석했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관심을 쉽게 끌고 만족감을 주었다.
기존 유튜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튜버 나리'들은 매우 지적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유튜버 나리'들에게 빠져들었고, 다른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면 만족을 못하게 되었다.
동민이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마지막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는 ‘코어 언어 모델'에게 말했다.
“이제 말날이라는 단어를 쓰도록 해"
동민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국에 퍼져있는 '나리'들이 말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리'의 주인들은 처음듣는 용어이기에 당황했지만, ‘나리'가 친절하게 용어 설명을 해주어 금방 알아들었다.
금세 온 국가가 ‘말날을 세우자'라는 아젠다로 시끌시끌하게 되었고, 이에 반응하는 여러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말날을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동호회, 말날까페, 출판사, 예능까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동민이는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에 대고 말했다.
“죽순들이 쑥쑥 자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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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몰입 경만이님의 댓글
과몰입 경만이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죽순들이 쑥쑥 자라는구나”
괴팍한 과학자 동민이가 갑자기 순둥순둥한 시골 강아지가 되어 버렸네요.
물론 긍정적인 변화를 바라보며 만족한 것일 수도 있고,
그동안 노력의 결실에 대한 뿌듯함이 잠시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괴팍한 과학자 답게, "죽순들이 쑥쑥 자라는구나" 라는 말를 던진 다음 또 다른 문제를 발견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죽순들은 잘 자라고 있지만, 시스템 문제로 인해 성장에 제약이 있다거나
사회의 언어, 지적 수준을 높였으나, 사회 통제와 권력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위험을 발견했거나 등등이 있겠네요.
아니면 언어가 사람들의 사고를 결정짓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환경적 요인, 상호작용이 중요하듯, 나리와 소통한 다음에는 문 밖에 있는 비언어적인 것들과 더 폭넓게 부딪치면서 말날을 세공하는 게 더 가치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