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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생들의 비밀 : 파도는 누가 일으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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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변지선 (123.♡.33.101)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20회   작성일Date 24-10-02 12:23

    본문

    영택이는 핵티비스트로 활동하는 내내 어느 쪽에 서 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대부분 도덕의 반대편에 있었다.

    영택이는 그 중 도덕의 반대편에서 행동하는 부류 그리고 행동하지 않는 부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행동하는 부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돈키호테를 연상케 하는 강한 의지와 낙관적인 색깔에 가깝다. 반대로 행동하지 않는 부류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처럼 가만히 앉아 끊임없이 분석하는 비관주의적인 색깔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돈키호테의 색깔은 무엇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까? 민중인가? 아니면 소수의 영웅인가? 반대로 지하생활자의 색깔은 무엇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까? 냉철한 비판에 몰두하는 지식인인가? 아니면 무기력함에 빠진 민중인가?

    돈키호테와 지하생활자의 공통점이 있다면 보편 세력에 저항한다. 보편 세력은 마치 바다 위를 떠 다니는 시체 같은 자들이다. 이들은 물이라는 지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이동할 줄 아는 존재들이며, 파동 에너지에만 움직임 맡기고 있을 뿐 파도를 거스를 힘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들은 거대한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겨 어느 쪽에 서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게 아닌,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다. 마치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검색하는 사람이 아닌, 누군가가 짜놓은 알고리즘에만 이끌려 유튜브 쇼츠에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처럼.

    새로운 변화를 야기하는, 새로운 파도를 일으키는 자들은 누구인가? 돈키호테인가? 아니면 지하생활자인가? 단편적으로 들여다 보면 돈키호테 세력이라 볼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 않다. 

    지하생활자 세력 중에서도 꿈이라는 키워드를 가슴 속에 품고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사색하다 보면, 새로운 소수 세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영택이는 이 세력을 짧은 머리의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들여다 보게 되었다. 친구의 손길에 이끌려 몰래 들은 강의였고, 강의 내용은 이와 전혀 관련 없었다.

    영택이가 도덕의 반대편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핵티비스트들 만의 문화에 찌들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가 핵티비스트로 활동할 당시, 소위 모럴패그*에 가까운 자들을 경멸기 때문이다. (* 한국어로 바꾸면 십선비에 가깝다.) 이들은 정해진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도덕을 수호하는, 파도에 이끌려 다니는 공허한 존재에 가까웠다. 그러니 당시 영택이는 자연스럽게 부도덕을 하나의 유희처럼 받아들이고 이에 저항하는 게 정의에 가깝다는 생각에 치우처져 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강한 파도에 저항하셨던 것으로 보이는 괴짜 느낌의 마 교수님과 맥주를 마시며 짧게 대화하는 시간을 보낸 뒤 더욱 또렷해졌다.

    마 교수님은 야한 창작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젖은 듯,

    "야하고 싶은데 요즘은 쉽지 않아."

    '나이가 많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영택이는 속마음을 내뱉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그 분 특유의 유약한 말투, 기운 없는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근본 없는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냥 도덕을 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생각을 하면 되는거 아닌가요?"

    "효중이는 어떤 생각을 하는데?“

    영택이는 효중이라는 친구의 이름을 빌려 교수님의 강의와 시험까지 대신 쳤기에 영택이를 효중이로 알고 계셨다.

    "제 여자친구가 엄청 예쁘고 사랑스럽거든요? 그런데 한 번 즈음은 멀리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침대에서 둘이 할 때는 나무만 보는 기분인데, 가끔은 숲이 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남자를 세 명 정도 불러서 여자친구의 움직임을 멀리서 구경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왜 세 명이야?"

    "한 명만 초대하면 제가 질투날 것 같아요. 두 명이 있어도 사실 주도권을 한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질투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세 명 정도가 적당할 거라 생각했어요. 추가로 생각해보면 섹스의 끝은 남자의 사정이잖아요? 저는 여자는 어디가 끝인지 궁금했어요. 두 명보다 세 명 정도는 있어야 그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해본 적은 없어요.“

    교수님은 흥미로움, 비웃음 그 어딘가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여자친구한테 말 해봤어?"

    "정신병자 취급하던데요? 그런데 섹스라는 게 성기의 마찰을 통해 무언가를 배출하는 게 목적은 아니잖아요? 마찰하는 과정에서 정서적인 교감과 함께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거니까요. 사랑이라는 것도 어느 한 곳에 멈춰 서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목적지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지만 보이지 않는 목적지에 대해 대화한 것 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목표를 함께 공유해야 관계가 더 단단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연인 뿐만 아니라, 부부 그리고 국가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해요. 만약 지향하는 가치나 목표가 없다면 쉽게 분열되겠죠. 무튼 이런 말을 하니까, 여자친구는 다행히(?) 정신병자에서 미친 변태 취급해주더라고요.“

    "여자친구가 허락하면 해 볼 생각은 있어?"

    "사실 어렵죠. 판타지에 가까워요. 왜냐면 제가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만큼, 낯선 남성 세 명도 제 여자친구를 성욕해소 도구로 삼지 않고 많이 사랑하고 아껴줬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낯선 사람을 믿기 어려우니 망치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려면 힘들지 않을까요?"

    “… 효중이는 꿈이 뭐야?”

    “비밀인데요? 그런데 남자 세 명 불러놓고 여자친구를 구경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자 마 교수님은 흥미로운 웃음, 비웃음도 아닌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야한 이야기가 아닌, 오스카 와일드,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탐미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영택이가 이 교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은 야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처럼 다가왔다는 점이다. 야한 이야기를 할 때와 다르게 학생들과 대화할 때 미소를 자주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생들을 좋아하고 날 것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시는 인자한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그 분의 문학들을 들여다 보면 야한 소설, 예술이 아닌, 여러 문학 기법과 이론들을 하나의 예시처럼 정리해놓은 것처럼 다가왔다. 마치 누군가를 일깨우기 위한 소설처럼 말이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나코프의 <롤리타>에 비해 다소 정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본인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본인의 문학 작품에 녹여놓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작품으로 내놓으셨다면 생동감 넘치는 유연함이 녹아들지 않았을까.

    영택이는 궁금했다. 야한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야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 어쩌면 도덕주의에 찌들어 있는 위선적인 대한민국의 모습을 하나의 질병으로 바라보셨고 이를 치료하고 싶어서 그러신 게 아니었을까. 영택이는 그 대화를 통해 느꼈다. 어쩌면 새로운 파도를 만드는 세력은 지하생활자이고 그 파도를 키우는 건 돈키호테 세력일 수 있다는 것을.

    돈키호테 세력, 지하생활자 세력 중 소수 세력이라 하니 말이 길어진다. 그렇다면 영웅과 천재 정도로 바꾸면 어떨까. 돈키호테 세력은 과감한 행동을 통해 정치권력이나 권모술수로 새로운 세상을 열러고 하는 사람들이기에 영웅에 가깝다. 반대로 지하생활자 세력 중 소수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사고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천재에 가깝다. 어쩌면 이 천재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말하는 천재와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영웅과 천재라고 쓰니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다시 돈키호테 세력, 지하생활자 세력으로 바꿔야겠다.

    돈키호테 세력은 커다란 파도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파도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지하생활자 세력에게 있는 게 아닐까. 프랑스 혁명의 불씨를 일으킨 모차르트, 볼테르, 루소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용기와 결단력을 가진 리더십의 돈키호테 세력들을 사랑해왔다. 사실 정적이고 지루한 지하생활자 이야기를 흥미롭게 바꾸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파도를 이끄는 것은 지하생활자가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택이가 앞으로 나서서 활동하는 게 아닌, 지하생활자처럼 핵티비스트로 활동하는 걸 멋있게 여긴 이유였다.

    물론 새로운 파도를 만든다는 건 어렵다. 이미 역사적으로도 수 많은 실패한 혁명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도덕이라는 거부하기 힘든, 필연성에 가까운 파도에 저항하다, 휩쓸리는 수 많은 좀비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의 결말은 크게 네 가지다.

    1. 생존자가 안전한 곳으로 탈출.

    2. 좀비가 아닌 사람들과 다음 위험을 꾸준히 맞설 준비.

    3. 미사일 폭격을 통해 좀비 멸종.

    4 좀비와 공존하는 것.

    가장 긍정적인 결말은 3번 미사일로 좀비들을 멸종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영택이는 미사일이라는 강력한 공격 수단이 없으니 현실에 적용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은 2번인 생존자들끼리 따로 모여 좀비와 맞설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핵티비스트 활동을 통해 꾸준한 데이터베이스를 모으며 정보공개 혁명을 촉구한 인물과 특정 국가를 향한 사이버 공격을 준비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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