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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사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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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변진영 (218.♡.110.45)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11,284회   작성일Date 23-12-23 19:4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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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아주 가끔 심심할 때마다 최진석 교수님의 강의를 라디오처럼 틀어놓는다. 새말새몸짓 유튜브 ‘최진석 장자 철학 7-1’을 보면,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야 참된 지식이 있다.(有眞人 而後有眞知) 라는 말이 나온다. 난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참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특정 신념과 가치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다. 다시 말해, 스키마를 벗어 던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기질에 삶의 방향을 위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는 문학과 영화, 드라마와 같은 문화 콘텐츠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누군가는 특정 신념이나 가치를 따라야 진실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건 진실한 게 아니라, 멍청함에 빠진 것이다. 다시 말해 수동적이다. 특정 신념과 가치에 의해 판단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참된 사람, 진실한 존재는 능동적이다. 능동적인 존재는 특정 신념과 가치를 계속 쥐고 있는 게 아닌, 상황에 따라 내려놓을 줄 안다. 상황에 놓인 자기 자신을 진실되게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자신이 쥐고 있던 신념 A, 가치 A를 내려놓고 이와 상반되는 신념 B, 가치 B를 집어들 준비가 되어있다. 각종 드라마, 영화, 문학은 작품 속 인물들에게 꾸준히 질문을 던진다. ‘넌 지금 이 상황에도 신념 A를 계속 쥐고 있을래?’, ‘넌 지금 이 사건이 터졌는데도 신념 A를 계속 쥐고 있을래?’, ‘지금 이 상황에서도 네가 쥐고 있는 신념 A가 옳다고 생각하니?’ (이러한 딜레마는 영화나 문학, 드라마에서 그려지지만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다.) 작품 속 진실하게 그려진 인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황과 사건을 마주했을 때 기존에 쥐고 있던 신념 A를 내려놓고 가장 보편타당한 것을 선택한다. 반대로 신념 A를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은 공포영화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 그것도 멍청하게.

    참된 사람, 진실된 사람, 나다운 존재는 특정 신념과 가치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존재가 아니다. 참된 사람은 현재 마주한 상황, 사건에 따라 쥐고 있던 신념과 가치를 내려놓거나 완전히 상반되는 신념과 가치를 손에 쥘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영화, 드라마 그리고 문학을 많이 접해본 사람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답을 낼 것이다. 문화 콘텐츠를 많이 접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손에 쥔 가치를 깊게 들여다보거나, 나 자신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깊게 들여다본 경험이 있더라도 나와 비슷하게 답할 것이다. 이는 세상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본 사람, 세상과 맞서 싸워본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스키마를 벗어난 경험이 있다. 깡패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견딘 끝에 대장군이 된 한신처럼 말이다.
    스키마는 개인이 접한 정보를 조직하는 기본적인 틀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가정과 학교 또는 커뮤니티를 통하여 배운 것들을 조합하여 자기만의 스키마를 형성한다. 그래서 이 스키마는 안경과 같다. 만약 안경이 검정색 렌즈로 되어 있다면 세상은 검정빛으로 투영된다. 비판과 비평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불평하는 것을 지적인 것이고 참된 것이라 믿을 것이다. 특정한 스키마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바보가 된다. 내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이에 지지한다고 하여 그것이 진실인 법은 없다. 상황과 사건에 따라 진실은 언제든지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진실하다는 것은 참 어렵다. 노엄 촘스키는 지식인의 역할이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지식인은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진리를 밝히는 데 실패한다. 그 이유는 진실의 포장지에 싸여 있는 수많은 정보들은 교묘한 진영논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진영논리에 지배당해 신념과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신념과 가치를 내려놓을 준비가 된 진실된 사람들은 진영논리에 넘어가지 않고 사실을 마주하여 진리를 밝힐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야 참된 지식이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지식인으로 빙의하여 특정 정치인이 우파인지 좌파인지, 특정 정책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구분하기 바쁘다. 더 나아가 과거의 지식인 중 한명인 장 자크 루소를 반문명사관, 볼테르를 문명사관이라고 단정하기 바쁘다. 하지만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장 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는 노자의 사상인 소국과민에 가까운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나. 모든 것은 변화하는 상황과 사건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 마련이다. 상황과 사건을 진실되게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을 뱉을 수 있는 이유다.

    이 세상에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형성되어 온 세계관이 닿지 못한 부조리한 진실들이 만연해 있다. 그리고 이 진실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서서히 드러나기도 하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드러나기도 한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진보한 과학에 의해 드러난 부조리를 외면하고 과거에 머무르려 한다면, 진실한 사람은 지금 현재 가장 보편타당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 과거에 구축한 가치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왜 사람들은 뉴스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앵커보다 뉴스 말미에 등장하는 스포츠 뉴스 아나운서와 기상 캐스터를 좋아할까. 어쩌면 이들이야 말로 뉴스에서 가장 진실한 존재라서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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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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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도님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1.♡.46.95) 작성일 Date

    참된 지식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지적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푸른 곰팡이가 균을 죽인다'라는 지식과 '우리 집 앞에 치킨집이 두개 있다'라는 지식 중 참된 지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전자일 것입니다. 전자는 항생제를 발견하여 감염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지만, 후자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갖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지식을 생산할 수 있을까요? 저는 '문제를 포착하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이러스가 아직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풀고자 물고 늘어진 플레밍에게는 우연히 찾아온 '푸른 곰팡이'의 존재가 포착되었습니다. 그러나 '집 앞에 치킨집이 두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포착하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은 참된 인간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문화적 존재이다' 라는 최진석 교수의 가정이 옳다고 가정했을 때, 인간은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변화는 문제를 포착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더 참된 인간은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삶의 질과 양을 상승시키지 않는 변화들은 언급 대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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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진영님의 댓글의 댓글

    변진영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오~ 저도 '문제를 포착하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참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최진석 장자 철학 7-1' 영상에서도 질문과 대답에 대한 말을 해주시는데요. 상도미님이 말씀해주신 '푸른 곰팡이가 균을 죽인다.'는 푸른곰팡이 또는 균을 향한 질문을 던져 오랫동안 물고 늘어진 결과라면, '우리 집 앞에 치킨집이 두 개 있다.' 는 동네에 있는 치킨집 수에 대한 질문을 하고 1초만에 답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저도 둘 중에 무엇이 참된 지식이냐 묻는다면 전자라고 생각해요.
    만약 '왜 우리 집 앞에 치킨집이 두 개나 있을까?' 또는 '우리 집 앞에 있는 두개의 치킨집은 왜 모두 프렌차이즈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 끝에 물고 늘어져서 동네 문제를 포착하여 답을 냈다면 이 또한 참된 지식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는 세계를 멈춰있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로 인식합니다. 변화하는 유기체로 인식하는 순간, 세상에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세상을 열거나 세상을 바꾼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을 열거나 세상을 바꾼 극소수의 사람들을 역사의 전환점 앞까지 이끌어준 존재들이 항상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존재가 역사의 행간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무명의 존재라고 생각해요. 모차르트라는 존재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누나가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의 귀에 바로크 음악이 닿게 했던 당시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차르트가 내놓은 오페라를 보면, 문제를 오랫동안 물고 늘어진 결과로 다가옵니다. 계급 간의 사랑이 금기시 사회 문제를 길게 물고 늘어져 '피가로의 결혼'. 아버지의 죽음을 길게 물고 늘어져 '돈 조반니',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질문을 물고 늘어진 끝에 '마술피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피가로의 결혼'을 쓴 '보마르셰', '돈 조반니'를 쓴 '로렌초 다 폰테' 또한 우리에게는 무명의 존재에 가깝죠. 세상을 바꾼 모차르트라는 사람은 세상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또는 야기하고 있는 무명의 존재인 보마르셰, 로렌초 다 폰테라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발견한 이유는 하나의 문제를 오랫동안 물고 늘어진 결과라 생각합니다.  (*논외로 영화 '아마데우스(1984)'를 보면 모차르트를 참 경박하게 그리는데요. 그가 내놓은 결과물들을 보면 절대 경박하고 가벼운 사람이 아닌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모차르트는 너무 옛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가장 최근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스마트폰의 핵심 기능인 두 손가락으로 확대 또는 축소하는 멀티터치 기술을 만들어 애플이 인수한 핑거웍스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거나 세상을 바꾼 역사적인 인물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 무명의 존재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의 문제를 오랫동안 물고 늘어진 사람뿐이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역사에 남을 수 있으며 때로는 역사의 행간에 무명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무엇이 변화를 야기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은 상도미님의 말씀처럼 문제를 포착하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단순 비평과 비판을 즐기는 게 아닌, 이질적인 생각을 부조리함으로 치부하지 않고 잠시 품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상도미님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