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의 의지: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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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라 한다면,
오직 이름만이 형상만이 떠돌아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자를 떠올리게 한다.
고통의 바다임이 그에게 처절하게 다가왔을 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간지러움과 같은 것을 마주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하필 고통이었을까?
"늙어감도 질병도 죽음도 삶 자체도 고통이다.즉,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그래서 이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아온 대로 답습하는 삶은 오류다. 그것은 거부되어야 하며 그로인한 고통도 부조리다."
모든 것에게 해당되는 숙명이 한 인간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것으로 대두된다.
고통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삶의 조건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양자 사이에서 운동으로 나타나는 산출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이 운동속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구분부터 시작한다. 생노병사는 자연적이다. 그러나 그것 사이사이에 있는 것. 4가지 고통이 결과적인 것이라면 그 결과의 과정들은 철저히 인간에게 달려있는것이다. 그것을 욕망이라 할까? 집착이라 할까?
정해져 있는 것 외의 모든 것에는 어떠한 본성•실제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있다고 믿는 그런 경박한 아니 그런 것을 상상하게 되는 본능과 가장 가까운 최초의 믿음이 정상적 인간의 존재조건에 뿌리내리고 있다!
고통을 마주한 자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어떠한 것도 굳게 믿어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고 확실한 눈빛을 빌려줄 실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보인다. 본디 흩어진 것이 모인 것이고 그것은 언제라도 다시 흩어질 수 있으며 어떤 우연에 의해 감각적으로 잡힌 것은 다시 우연히 감각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잠깐의 섬광과 같다. 강력한 빛으로 어둠속으로 몰아 넣으면서 섬광이 사라졌음에도 그 눈부심에 못이겨 눈은 계속해서 닫혀있다. 섬광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만연한 고통에서부터 그 원인을 파악하고 원인을 제거해야할 사명에서 새로운 삶의 사명을 짊어진 자는 어느새 구원자가 되었다.
자신의 생각과 삶이 일치하여 그렇게 일생을 고통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실천하다. 여타 다른 인간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한 그는 '열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류를 대표하는 성인인 그는 어째서 고통을 마주했을까? 응당 그러는게 당연했던 것일까? 당장에도 타당한 그 깨달음이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공통적 이유를 뒷받침해주는 것을 우리 내부에서 발견한다고 해도 발견한 그 상태에 그렇게 머물러야 하는 것인가? 다시말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큰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충분히 그 깨달음의 원인을 겪은 자에게서 동일하게 발아하고 있다. 즉, 고통을 겪은 자, 고통을 겪을 자, 고통 속에서 숨막히는 자 등 모든 이들이 이것들에 해당되니 참으로 시의적절한 동시에 언제 어디서라도 뿌리내려질 수 있는 진리이다!
이제 진리를 알고만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이미 필요한 것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가능하게 했던 고통이 '질'적으로 달랐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양적으로 같았다면, 이 세상은 불국화되었을 것이다. 최초의 출가 이후 고통은 철저한 변화속에서 최초의 고통을 기반한 계율과 끊임없이 투쟁되었다. 싯타르타의 문제는 고통이 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외의 존재자와는 다른 고통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파급력은 자연스럽게 따라야할 길을 펼쳐보이며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게한다. 이미 존재하는 진리는 보편적 필요성에 의해서 문제시 되고 있기에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당장 머리를 깍고 계율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진리를 향하는 확실한 길로 간다.
불교 세계관의 확장이 일어나고 있는 소설 《서유기》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은 인간 이외의 존재자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고통은 인간만이 겪는게 아니고 인간에게만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만이 계율을 따라야하는 기회에 놓여있는 것도 아니다. 온갖 요괴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열반을 시기하거나 열반에 좌절되어 중생들을 위기로 빠트리는 각자의 사정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경지에 이르는 과정은 무진장하다.
인간 이외의 존재자가 열반을 부러워하고 거기에 도달하려는 의지는 그만큼 불교적 진리가 미치는 파급력을 대변하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방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하나의 문제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모두가 깨달음을 원하고 경탄하고 부러워할 만한 상태이자 도달할 수 없는 것이자 심지어 스스로를 파괴하게 하는 연결고리가 된다.
다른 한편 불교의 세계관의 심오함과 광활함 속에서 신화로까지 확장되어 최상의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들의 이런저런 상황은 반대로, 다양한 세계가 겹쳐있는 이야기 밖았의 세계는 반대로 고통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유일한 자 즉, 질문하는 인간의 특권처럼 보인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이름짓고 신경체계의 자극으로 명명하여 그것을 수량화하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것, 다시말해 이미 있는 것들이 중지된 채로 아니 그것이 붕괴된 자리에서 다시금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정신적으로 마주한 상태로써 차라리 비정상인이 되는 것.
부정성에서 나타나는 정신의 생명운동은 근본적인 균열을 앞질러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열반은 고통과 아무 상관없어 보인다. 차라리 그것은 봉합할 수 없고 언제나 존속하고 있으며 무조건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들어가서 고통의 심급이 있다는 의미이다. 제거될 수 있는 고통, 외면할 수 있는 고통, 쓸모없는 고통 그렇게 고통의 제거가 즉각적이면 즉각적일 수록 그것들은 열반과는 상관없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감내해야하 하는 것을 가장 기민하게 아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삶이 소중한 것임을 몸소 체험하는 파계자들이며 그들은 그것에 대해 순수한 반대의 화신이된다.
"최초의 고통이 그 계율의 무게감만큼 진중하고 깊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고통이 주는 슬픔, 괴로움, 허무함, 외로움, 치욕, 갈증 등은 그것들 못지 않게 기쁨과 환희와 황홀경이 있음이 있다. 전자를 없에기 위해 후자도 없애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할 수 없다! "
파계를 행하는 요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고통에 대한 것이 부처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 아닐 뿐더러 고행의 실천은 의심으로 빠지는 순간 지켜질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근기根機라는 표현이 있듯이 방법론과 실천을 행하는 자는 구분되어 있음이다.
열반에 대한 열망 즉, 고통은 다른 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대상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니며 실제도 아니고 단순히 우연적으로 연합된 무엇인가일 뿐인데 그것에 집착하여 고통이 나타난다. 집착에서 나타나는 고통은 온세상에 퍼져있으며 그것은 인간에게서 문제가될 만큼 인간의 행하며 겪게되는 법칙처럼 보인다. 그러한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본디 아무 상관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허상이다. 모든것은 속세의 연, 자아 등등 나아가 언어적 허상까지 해체되며 비로소 그러한 경지와 상태가 있음을, 존재자체가 그러함을 나타낸다. 모든 고통이 일소된 상태, 그리고 그것이 다시 찾아올 수 있음을 예상하는 상태 그래서 규율에 자신을 맞기는 상태 규율이 나아가 규율을 생산하는 상태다.
기억상실증, 다중인격, 경계선 장애 등 하나의 비정합적인 정신상태를 상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철저히 그 시작이 상징계적이어야 하며, 적어도 즉자와 대자 사이에서 운동하는 주체이어야만 한다.
집착과 고통 그리고 왜 하필 집착이고 왜 집착은 생산되며 또 왜 하필 고통일까? 열반의 경지는 고통의 끊김일터인데 왜 그것의 열망이 고통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고통의 '상태'를 그 무한대적 순환을 이루는 것을 앞질러 보는 정신운동이 순환의 고리를 단절시키는 상태로까지 나아간다. 고통의 상태가 아닌 또 다른 상태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고통에서 부터 발현된 것이지만, 그것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 욕망을 통해 재해석되는 것이다.
열반에 오르는 자에게서 욕망을 찾는다는 것은 상당히 불경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을 추동시키는 힘으로써 설명되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욕망은 본능과 욕구와는 다르다. 그것은 좌절된 욕구요. 감시망을 우회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반복되지 않은 바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지면이다.
반복되는 욕망을 공격하는 반복되지 않은 욕망이 있다. 욕망은 고통을 낳았지만 고통은 욕망을 제거하고자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로인해 욕망이 욕망 스스로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 무와 같은 상태로의 의욕 조차(Willen zur Nicht)도 하나의 욕망이 되었다.
생이 아닌 죽음으로 나아가는 욕망, 그것은 생명체의 자기보존, 유전자적인 전파의 본능과는 상반되는 죽음충동이다.
"Sivis Vitam, para Mortem( 삶을 위해선 죽음에 대비하라)"
진정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는 죽음을 가르키고 죽고자 하는 욕망은 삶을 긍정하게 한다. 삶의 욕망은 진정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깨달은 자는 직시한다. 그 본능과 같은 길을 죽음의 힘으로 반박한다.
언제나 생의 본능에는 근본적 본능 뿐만아니라 안정화의 방법론, 항상성의 본능이 같이 작동된다. 인간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을 싸는것이 가능한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디선가 도표화되고 계층화된 욕망의 피라미드가 적절히 설명하고 있는 욕망은 부처의 입장에서 철저히 고통의 순환이요.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또 다른 욕망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의 방향을 비틀어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열반의 욕망을 부추기는 반대편의 욕망, 즉 생의 욕망은 무엇일까? 마땅히 그것은 윤회라는 탁월한 개념으로 설명되는 끊임없는 반복의 원동력이다.
오직 이름만이 형상만이 떠돌아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자를 떠올리게 한다.
고통의 바다임이 그에게 처절하게 다가왔을 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간지러움과 같은 것을 마주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하필 고통이었을까?
"늙어감도 질병도 죽음도 삶 자체도 고통이다.즉,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그래서 이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아온 대로 답습하는 삶은 오류다. 그것은 거부되어야 하며 그로인한 고통도 부조리다."
모든 것에게 해당되는 숙명이 한 인간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것으로 대두된다.
고통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듯이 보이는 삶의 조건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양자 사이에서 운동으로 나타나는 산출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이 운동속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구분부터 시작한다. 생노병사는 자연적이다. 그러나 그것 사이사이에 있는 것. 4가지 고통이 결과적인 것이라면 그 결과의 과정들은 철저히 인간에게 달려있는것이다. 그것을 욕망이라 할까? 집착이라 할까?
정해져 있는 것 외의 모든 것에는 어떠한 본성•실제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있다고 믿는 그런 경박한 아니 그런 것을 상상하게 되는 본능과 가장 가까운 최초의 믿음이 정상적 인간의 존재조건에 뿌리내리고 있다!
고통을 마주한 자는 그것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어떠한 것도 굳게 믿어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고 확실한 눈빛을 빌려줄 실제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보인다. 본디 흩어진 것이 모인 것이고 그것은 언제라도 다시 흩어질 수 있으며 어떤 우연에 의해 감각적으로 잡힌 것은 다시 우연히 감각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잠깐의 섬광과 같다. 강력한 빛으로 어둠속으로 몰아 넣으면서 섬광이 사라졌음에도 그 눈부심에 못이겨 눈은 계속해서 닫혀있다. 섬광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만연한 고통에서부터 그 원인을 파악하고 원인을 제거해야할 사명에서 새로운 삶의 사명을 짊어진 자는 어느새 구원자가 되었다.
자신의 생각과 삶이 일치하여 그렇게 일생을 고통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실천하다. 여타 다른 인간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한 그는 '열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류를 대표하는 성인인 그는 어째서 고통을 마주했을까? 응당 그러는게 당연했던 것일까? 당장에도 타당한 그 깨달음이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공통적 이유를 뒷받침해주는 것을 우리 내부에서 발견한다고 해도 발견한 그 상태에 그렇게 머물러야 하는 것인가? 다시말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큰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충분히 그 깨달음의 원인을 겪은 자에게서 동일하게 발아하고 있다. 즉, 고통을 겪은 자, 고통을 겪을 자, 고통 속에서 숨막히는 자 등 모든 이들이 이것들에 해당되니 참으로 시의적절한 동시에 언제 어디서라도 뿌리내려질 수 있는 진리이다!
이제 진리를 알고만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이미 필요한 것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가능하게 했던 고통이 '질'적으로 달랐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양적으로 같았다면, 이 세상은 불국화되었을 것이다. 최초의 출가 이후 고통은 철저한 변화속에서 최초의 고통을 기반한 계율과 끊임없이 투쟁되었다. 싯타르타의 문제는 고통이 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외의 존재자와는 다른 고통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파급력은 자연스럽게 따라야할 길을 펼쳐보이며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게한다. 이미 존재하는 진리는 보편적 필요성에 의해서 문제시 되고 있기에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당장 머리를 깍고 계율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진리를 향하는 확실한 길로 간다.
불교 세계관의 확장이 일어나고 있는 소설 《서유기》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은 인간 이외의 존재자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고통은 인간만이 겪는게 아니고 인간에게만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만이 계율을 따라야하는 기회에 놓여있는 것도 아니다. 온갖 요괴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열반을 시기하거나 열반에 좌절되어 중생들을 위기로 빠트리는 각자의 사정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경지에 이르는 과정은 무진장하다.
인간 이외의 존재자가 열반을 부러워하고 거기에 도달하려는 의지는 그만큼 불교적 진리가 미치는 파급력을 대변하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방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하나의 문제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모두가 깨달음을 원하고 경탄하고 부러워할 만한 상태이자 도달할 수 없는 것이자 심지어 스스로를 파괴하게 하는 연결고리가 된다.
다른 한편 불교의 세계관의 심오함과 광활함 속에서 신화로까지 확장되어 최상의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들의 이런저런 상황은 반대로, 다양한 세계가 겹쳐있는 이야기 밖았의 세계는 반대로 고통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유일한 자 즉, 질문하는 인간의 특권처럼 보인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이름짓고 신경체계의 자극으로 명명하여 그것을 수량화하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것, 다시말해 이미 있는 것들이 중지된 채로 아니 그것이 붕괴된 자리에서 다시금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정신적으로 마주한 상태로써 차라리 비정상인이 되는 것.
부정성에서 나타나는 정신의 생명운동은 근본적인 균열을 앞질러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열반은 고통과 아무 상관없어 보인다. 차라리 그것은 봉합할 수 없고 언제나 존속하고 있으며 무조건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들어가서 고통의 심급이 있다는 의미이다. 제거될 수 있는 고통, 외면할 수 있는 고통, 쓸모없는 고통 그렇게 고통의 제거가 즉각적이면 즉각적일 수록 그것들은 열반과는 상관없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감내해야하 하는 것을 가장 기민하게 아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삶이 소중한 것임을 몸소 체험하는 파계자들이며 그들은 그것에 대해 순수한 반대의 화신이된다.
"최초의 고통이 그 계율의 무게감만큼 진중하고 깊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고통이 주는 슬픔, 괴로움, 허무함, 외로움, 치욕, 갈증 등은 그것들 못지 않게 기쁨과 환희와 황홀경이 있음이 있다. 전자를 없에기 위해 후자도 없애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할 수 없다! "
파계를 행하는 요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고통에 대한 것이 부처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 아닐 뿐더러 고행의 실천은 의심으로 빠지는 순간 지켜질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근기根機라는 표현이 있듯이 방법론과 실천을 행하는 자는 구분되어 있음이다.
열반에 대한 열망 즉, 고통은 다른 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대상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니며 실제도 아니고 단순히 우연적으로 연합된 무엇인가일 뿐인데 그것에 집착하여 고통이 나타난다. 집착에서 나타나는 고통은 온세상에 퍼져있으며 그것은 인간에게서 문제가될 만큼 인간의 행하며 겪게되는 법칙처럼 보인다. 그러한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본디 아무 상관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허상이다. 모든것은 속세의 연, 자아 등등 나아가 언어적 허상까지 해체되며 비로소 그러한 경지와 상태가 있음을, 존재자체가 그러함을 나타낸다. 모든 고통이 일소된 상태, 그리고 그것이 다시 찾아올 수 있음을 예상하는 상태 그래서 규율에 자신을 맞기는 상태 규율이 나아가 규율을 생산하는 상태다.
기억상실증, 다중인격, 경계선 장애 등 하나의 비정합적인 정신상태를 상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철저히 그 시작이 상징계적이어야 하며, 적어도 즉자와 대자 사이에서 운동하는 주체이어야만 한다.
집착과 고통 그리고 왜 하필 집착이고 왜 집착은 생산되며 또 왜 하필 고통일까? 열반의 경지는 고통의 끊김일터인데 왜 그것의 열망이 고통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고통의 '상태'를 그 무한대적 순환을 이루는 것을 앞질러 보는 정신운동이 순환의 고리를 단절시키는 상태로까지 나아간다. 고통의 상태가 아닌 또 다른 상태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고통에서 부터 발현된 것이지만, 그것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 욕망을 통해 재해석되는 것이다.
열반에 오르는 자에게서 욕망을 찾는다는 것은 상당히 불경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을 추동시키는 힘으로써 설명되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욕망은 본능과 욕구와는 다르다. 그것은 좌절된 욕구요. 감시망을 우회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반복되지 않은 바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지면이다.
반복되는 욕망을 공격하는 반복되지 않은 욕망이 있다. 욕망은 고통을 낳았지만 고통은 욕망을 제거하고자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로인해 욕망이 욕망 스스로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 무와 같은 상태로의 의욕 조차(Willen zur Nicht)도 하나의 욕망이 되었다.
생이 아닌 죽음으로 나아가는 욕망, 그것은 생명체의 자기보존, 유전자적인 전파의 본능과는 상반되는 죽음충동이다.
"Sivis Vitam, para Mortem( 삶을 위해선 죽음에 대비하라)"
진정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는 죽음을 가르키고 죽고자 하는 욕망은 삶을 긍정하게 한다. 삶의 욕망은 진정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깨달은 자는 직시한다. 그 본능과 같은 길을 죽음의 힘으로 반박한다.
언제나 생의 본능에는 근본적 본능 뿐만아니라 안정화의 방법론, 항상성의 본능이 같이 작동된다. 인간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을 싸는것이 가능한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디선가 도표화되고 계층화된 욕망의 피라미드가 적절히 설명하고 있는 욕망은 부처의 입장에서 철저히 고통의 순환이요.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또 다른 욕망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욕망의 방향을 비틀어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열반의 욕망을 부추기는 반대편의 욕망, 즉 생의 욕망은 무엇일까? 마땅히 그것은 윤회라는 탁월한 개념으로 설명되는 끊임없는 반복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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