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장/시즌1완결] 나의 언어 연대기(2) (말 - 장폴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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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4. 철학
호기로운 도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몸까지 망가져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존재는 정처 없이 표류했다. 스스로를 보듬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건, 책 속에서 길을 구하는 것뿐. 수개월을 고독에 침잠했다. 그러던 중 어느 철학자의 강론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것은 그때까지 구축된 내 의식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개벽이었다. 이른바 불가에서 일컫는 돈오점수(頓悟漸修).
부모가 만든 황량한 조건 속에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삶. 이것이 깨닫기 전 나의 세계다.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 기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루저였다. 어디서든 순응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삶이 최선이었다. 이러한 삶은 결국 기존 세계가 만든 프레임에 철저히 소모품과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것. 그렇게 살 수 없었다. 내 안에 무언가 나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떨쳐내고,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포효하라 속삭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 나의 태생적 조건을 온전히 긍정하게 됐다. 그전에도 부모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하지만 사회 통념과 가족에 대한 표상으로, 정상적인 환경에서 크지 못했다는 자의식을 가졌다. 진중한 성격도 어렵게 자라온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만약 아버지와 살았다면 정신적 고통과 분노로 성격장애, 인격파탄자가 됐을 터. 억압 없는 온화한 외할머니 품은, 강한 성정에도 부드러운 성품으로 나를 만들었다. 과거를 긍정하니, 현재를 긍정하게 됐다. 미래 또한 긍정으로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 긍정의 미래를 만들 것인가!
공부하고 사유하고 쓰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 후 동서양 철학을 망라, 환기되는 모든 것을 흡수했다. 그밖에 불교, 동의보감, 명리학을 섭렵하며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혔다. 무엇보다 주요한 건 글쓰기다. 정밀한 사유로 글을 써나갈 때 나를 한계로 밀어붙인다. 철학적 사유를 글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비로소 지력은 강해진다. 인간은 몰입할 때 자기 자신이 된다. 이때 가치 있는 몰입은 생산과 창조의 몰입이다. 글쓰기 만이 나를 몰입과 창의로 이끈다.
백과사전만 읽고, 사회 과목만 공부하며, 인문사회 서적만을 탐독했다. 절망의 심연에서 몸부림칠 때, 철학에서 길을 찾았다. 누구도 이러한 삶을 강요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세계의 실상을 탐구하여 삶의 양식으로 삼고자 함은 나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 즉 '철학적 가능성'은 비로소 때를 만났다. 철학을 통한 인간으로의 완성. 철학은 나의 소명이자 나의 언어다.
언어-5. 새문장
공부는 함께해야 한다. 혼자서는 어긋난 관성을 따라 안드로메다를 향하거나 독선에 빠진다. 초심자에겐 나침반이 되어줄 스승과 사우(師友)가 필요하다. 철학을 마음먹고 여러 스승을 찾아 깨달음을 구했다. 10여 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 주경야독하며 현인들의 지혜를 내재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내 안에 스승을 모시지 않는다. 철학을 구하는 인간에서, 철학하는 인간으로 상승해야 하기에.
경험 많은 삶은 굴곡지다. 굴곡진 삶은 불안정으로 지성을 밝히기 어렵다. 반면 안정으로 철학적 지식만을 추구한 삶은, 카오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나는 이러한 보편적 한계를 아우른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겪어낸 실존을 철학으로 승화시키는 것. 내 삶이 축복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형성된 업식(業識)을 깨달음으로 극복하는 과정. 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철학적 비전. 나의 사유는 길을 잃거나, 고뇌에 빠진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모든 잡념이 소거된 내게 이르는 상태, 몰입. 나는 오직 글로서 몰입한다. 글로서 내가 된다. 글로서 새문장을 생성한다. 새문장이란, 기성 문법을 재창조한 나의 언어 나의 철학이다. 존재와 삶의 이치에 통달하려는 부단한 담금질을 세상에 펼친다. 고통과 번뇌로의 해방. 잠재력과 가능성의 발현. 존재를 꽃피우는 나의 언어는, 철학을 향해 끝없이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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